러시아의 차기 지도자로 확정된 블라디미르 푸틴(60)은 소련 붕괴 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를 수렁에서 구해낸 '구세주'란 평가와 함께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서방과의 대결을 격화시킨 '권위주의적 통치자'란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다.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이자 KGB의 뒤를 이은 연방보안국(FSB) 수장을 역임한 푸틴은 2000~2008년 대통령직을 연임하며 카리스마적 통치로 혼란스런 러시아에 상당한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을 가져다줬다.
그 덕에 한때 80%대에 이르는 지지를 누리기도 했다.
유도 유단자로 각종 스포츠를 즐기는 그에겐 항상 '마초', '터프가이'란 별명이 따라다녔다.
하지만 반대세력에게 그는 제정 러시아 시절 이반뇌제로부터 소련의 스탈린으로 이어졌던 위험한 권위주의적 통치자의 전통을 계승하는 지도자였다.
헌법상의 대통령직 연임 금지 조항에 밀려 2008년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정부 근무 시절의 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총리로 잠시 물러앉았으나 이번에 다시 크렘린으로 복귀한 것.
◇ 옐친에 의해 전격 발탁돼 크렘린行 = 국내외적으로 정치적 무명 인사였던 푸틴은 1999년 8월 9일 보리스 옐친 당시 대통령에 의해 총리 대행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크렘린궁으로 이어지는 출세 가도에 들어섰다.
당시 47세였던 그는 소련 KGB의 후신인 FSB 국장을 맡고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의외의 인사였다.
옐친은 전격 인사를 단행하며 "내년에 있을 대선에서 푸틴이 후보로 나서길 원한다"고 말해 사실상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공표했다.
뒤이어 8월 16일 푸틴은 하원인 국가두마의 인준을 거쳐 정식 총리에 취임했다.
이후 건강이 더욱 나빠진 옐친이 푸틴에게 국정을 맡기고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면서 그는 하루 아침에 국정 최고 책임자가 됐다.
1999년 12월 31일 옐친이 전격 사임하면서 대통령 직무대행을 떠맡은 푸틴은 이듬해 3월 대선에서 53%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가 된 것이다.
크렘린에 입성한 푸틴은 특유의 카리스마로 극심한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으로 위기에 빠진 러시아를 안정시키며 국민의 신뢰를 얻어갔다.
◇ 카리스마 정치로 혼란 극복하며 민심 얻어 = 러시아 연방과 두 차례나 전쟁을 치르며 독립을 시도하던 남부 캅카스 지역의 체첸 자치공화국을 무력으로 굴복시켜 러시아인의 자존심을 살렸다.
전임자인 옐친 대통령이 1994~96년 벌인 제1차 체첸전쟁에서 러시아가 사실상 패배하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상처를 입었던 러시아인들은 푸틴의 대 체첸 강경노선에 전폭적 지지를 보냈다.
옐친 시절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막대한 부를 축적한 뒤 정치적 영향력까지 휘두르던 신흥재벌(올리가르히)에 대한 대대적 사정도 단행, '원숭이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다'던 재벌들의 오만을 꺾어놓았다.
푸틴에 대항하던 옐친 시절의 대표적 올리가르히 보리스 베레조프스키와 블라디미르 구신스키는 사정기관의 압력에 밀려 각각 영국과 스페인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아직도 러시아로 들어오지 못하고 외국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2003년 야당에 정치 자금을 대며 스스로 대권의 야망을 키우던 또다른 올리가르히인 거대 석유기업 '유코스' 사장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에겐 탈세ㆍ횡령 등의 혐의를 씌워 감옥에 가뒀다.
두 차례에 걸친 재판으로 모두 1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지금도 옥중 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올리가르히 척결은 전체 국민의 몫인 국부(國富)가 약삭빠른 일부 기업인들의 손에 부당하게 넘어간데 불만을 품고 있던 민초들의 마음을 달래주는 효과를 거뒀다.
◇ 연 7%대 경제성장 이끌어 '구세주'로 부상 = 하지만 푸틴이 무엇보다 국민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경제성장 때문이었다.
푸틴은 집권 이후 때마침 찾아온 고유가 상황을 활용, 1998년 디폴트(채무불이행)까지 몰렸던 러시아 경제를 성장 기조로 돌려 놓았다.
푸틴 집권 이후 국제금융위기가 터진 2008년 이전까지 러시아 경제는 연 7%대의 눈부신 고속성장을 계속했고 국민생활은 눈에 띄게 나아졌다.
몇개월 씩 밀리던 월급이 제때 나오기 시작했고 1990년 대 말 100달러를 밑돌던 평균 월급이 2008년 무렵엔 500달러를 넘어섰다(현재는 약 800달러).
국내 생산이 회복되고 수입이 확대되면서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텅 비다시피 한 상점 앞에 긴 줄을 서던 일은 옛날 얘기가 돼갔다.
그 결과 푸틴에 대한 지지율이 70%대로 치솟고 그를 러시아를 위기에서 구한 '구세주'로 칭송하는 여론이 번져 갔다.
크렘린의 자유언론과 야당 인사 탄압, 체첸 주둔 러시아군의 인권 유린, 관료들의 부정부패 등을 지탄하는 야당의 목소리는 푸틴의 공적에 가려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푸틴은 2008년 5월 3기 연임을 금지한 헌법 조항에 밀려 크렘린 궁을 떠났다.
옛 소련 정보기관 KGB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3선 개헌이란 무리수를 두는 대신 대통령에서 총리로 물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하는 실용적 길을 선택했다.
후임엔 동향(상트페테르부르크)에 레닌그라드 대학(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대 후배로 90년대 초 상트페테르부크 시(市)정부 시절부터 근 20년을 동고동락한 메드베데프를 앉혔다.
◇ 실세 총리에사 크렘린에 복귀 = 이에 따라 러시아엔 형식상의 최고지도자인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실질적 권력자인 푸틴 총리가 함께 통치하는 '이중권력'의 시대가 열렸다.
총리가 된 이후에도 푸틴은 '러시아의 실세 지도자'란 평가를 한 번도 잃지 않았다.
2008년 시작된 국제금융 위기의 여파로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뒤에도 그에 대한 지지도는 여전히 60%대를 웃돌았다.
더딘 경제회복과 근절되지 않는 부정부패, 민주주의 후퇴 등을 비판하는 국내외의 반(反) 푸틴 여론이 서서히 고개를 들었지만 그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푸틴은 지난해 9월 말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나서 달라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제안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차기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는 자신이 대통령직에 복귀하면 메드베데프는 총리를 맡아 내각을 이끌 것이라고 천명했고 메드베데프도 이를 받아들였다.
뒤이어 통합 러시아당은 지난해 11월 푸틴을 여당의 공식 대선 후보로 추대했다.
설마하던 푸틴의 크렘린 복귀 시나리오가 현실화하면서 민심은 서서히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같은 분위기는 지난해 12월 치러진 총선에서 여당이 거둔 49% 지지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대규모 선거 부정 의혹까지 불거지면서 반(反) 푸틴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10만 명이 넘는 인파가 거리로 몰려나와 푸틴 퇴진을 외쳤다.
하지만 그가 물러난 자리를 채울 마땅한 야권 지도자가 부상하지 않는 가운데 표심은 결국 다시 푸틴을 차선의 지도자로 선택했다.
그렇다고 푸틴의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과 더 많은 민주주의를 바라는 민심이 완전히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3선 도전에 성공한 푸틴의 앞날이 밝지만은 않은 이유다.
(모스크바=연합뉴스)
카리스마 정치로 3선 관철한 푸틴
옐친에 전격 발탁돼 처음 크렘린 입성<br>개방 이후 혼란 극복하며 '구세주'로 부상<br>총리로 물러났다 4년만에 크렘린 복귀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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