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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가드레일 파손…자진 신고는 못해도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취재파일] 가드레일 파손…자진 신고는 못해도
취재는 블랙박스 영상에서 시작됐습니다. 경남 의령 정암교 추락 사고 얘기입니다. 노약자들을 위한 무료 의료 봉사에 나섰다가 참변을 겪은 의료진들의 가슴 아픈 얘기이기도 합니다. 자그마치 4명이 세상을 떠났고 6명이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 궁금했습니다. 정확한 원인이 나오더라도 알려지지 않을까봐 걱정됐습니다.

오전을 달려 도착한 정암교는 차분했습니다. 그날의 악몽을 잊은 듯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정암교는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왜 사고가 일어났는지, 어떻게 해야 사고를 재발할 수 있는지를 말입니다.

사고 당시 승합차는 빙판길에 이리저리 미끄러지다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추락했습니다. 1차 원인은 얼어붙은 도로였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습니다. 승합차가 들이받은 가드레일은 차량을 조금도 지탱해주지 못했습니다. 부서져 나간 가드레일은 이미 새 것으로 교체돼 있었습니다. 새로 해넣은 이처럼 부자연스러웠습니다.

가드레일 이곳저곳을 살펴봤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군데군데 가드레일이 뚫려 있었습니다. 손으로 밀어보니 덜렁덜렁했습니다. 수평 가드레일을 받쳐주는 수직 기둥은 어땠을까요. 기둥 고정용 볼트와 너트도 심각했습니다. 녹슨 채 볼트만 남아 있는 기둥, 볼트와 너트가 휘어져 위태롭게 박혀 있는 기둥...불과 보름 전에 참사가 있었던 다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딱 사고가 난 그 부분만 수리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고가 난 다리 위의 가드레일이 저 정도인데, 다른 곳은 어떨지 상상이 갔습니다. 역시나 였습니다. 서울 강변북로 위의 가드레일도 문제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한강대교 아래 지점이 특히 그랬습니다. 그곳은 가드레일의 일종인 가드케이블이 설치돼 있는 곳입니다. 케이블이 힘없이 늘어져 있는 구간이 50미터가 넘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도 마구 흔들 수 있었습니다. 케이블을 받쳐주는 기둥이 뽑혀 있는 곳도 있었습니다. 강변북로를 자주 이용하는 저로서는 기가 막힐 뿐이었습니다.

전국에 설치된 가드레일 중 국토해양부가 관리하는 국도 상의 가드레일만 8천9백km에 이릅니다. 고속도로나 지방도로에 있는 가드레일까지 합치면 어머어마하겠지요. 충격적인 것은 작년 기준으로 전국 가드레일 가운데 89%가 '차량 충돌 안전 실험'을 거치지 않은 가드레일이라는 것입니다. '안전 실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지침이 나오기 전에 세워졌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국토해양부의 과장님 말씀대로 일제 점검을 해서 노후된 가드레일을 차츰차츰 교체해 나가면 되겠지요. 여기에 더해 지속적인 관리도 필요할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운전자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가드레일이 왜 부서지고 파손될까요? 그것은 다름아닌 가드레일을 손상시킨 대신 목숨을 건진 운전자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숨 건져 안도는 했지만 신고 없이 제 갈길 간 운전자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고가 없는 한 공무원들이 모든 가드레일 사고를 그때그때 확인할 방법은 사실상 없겠지요.

                             


가드레일은 공공기물입니다. 파손하면 배상 책임이 따릅니다. 쉽게 자진 신고할 수 없는 이유이겠지요. 그래도 '어느 어느 구간에 가드레일이 부서진 것 같더라' 정도의 '목격자 같은 신고'라도 한다면 어떨까요? 국토해양부나, 각 지방자치단체 민원실에 전화 한통 하면 된다고 합니다.

끔찍한 가정이겠지만 만약 정암교 추락 사고를 유발한 가드레일이 이미 다른 운전자에 의해 손상된 가드레일이었다면 어땠을까요? 그 끔찍한 가정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담당 공무원은 '절대 아니다'라고 답변하지 못했습니다.

정암교 사고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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