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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3년도 안 됐는데 부품이 없어?

-얼리 어답터 강요하는 대기업들

[취재파일] 3년도 안 됐는데 부품이 없어?
우리 나라에는 유독 얼리 어답터가 많다고들 합니다. 호기심 많은 국민성(?)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기술 개발에 발 맞춰 아니, 그 보다 앞서 나가고 있는 광고와 마케팅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거나 얼리 어답터들에게는 상관 없는 일이요, 오히려 2-3년만에 어느 정도 보상까지 해 준다니 환영할 만한 일 일 수 있지만, TV를 비롯한 가전제품의 부품 보유 기간과 부품이 없을 때 주어지는 보상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가전제품이 고장 난 상황을 전제로 말씀 드리는 겁니다.

지난 해 공정거래위원회는 '소비자분쟁해결기준'을 개정하면서 TV와 냉장고, 에어컨 등 백색가전의 부품 보유 기간을 평균 6-8년으로 1년씩 상향 조정했습니다. 소비자들이 오랫동안 쓸 수 있도록 부품을 확보해 놓으라는 뜻이었죠. 하지만 고시한 부품 보유 기간은 권고사항일 뿐 강제력이 없는 상황이라 기업들이 정말 부품 확보 노력에 힘을 쏟을 지는 미지수였습니다. 한국소비자원이나 녹색소비자연대 같은 시민단체에 확인해보니, 실제로는 여전히 구입한 지 2-3년 밖에 안 된 가전제품을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는 소비자 신고가 한 달에 수십건 씩 접수되고 있었습니다.

                                        


제가 만난 한 족발집 사장님은 삼성전자 46인치 LCD TV를 180만 원이나 주고 구입했는데, 3년 만에 고장이 났고, 황당하게도 부품이 없어 고칠 수 없다는 얘기를 들으셨답니다. 보상이라도 제대로 해 주면 화가 덜 났을텐데 처음에 46만 원을 제시했고,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본사에까지 항의를 하니 64만 원을 보상해줬답니다. 감가상각 보상은 기준율이 다 정해져 있는데 처음에는 왜 그렇게 낮은 금액을 불렀을까요. 아무튼 만족스럽지는 않은 금액이나마 보상을 받기는 했지만, 또 200만 원 가까운 TV를 구입하기에는 불신감이 너무 커진 상황이었습니다. 사장님은 3년 동안 창고에 보관했던 브라운관 TV를 다시 꺼내 완전히 망가질 때까지 쓰실 생각이랍니다.

                                           


부품이 없다는 말에 하는 수 없이 새 제품을 구매했는데, 한참만에 부품을 들고 나타나 소비자가 골탕을 먹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치냉장고만 아니었다면 그리 급하게 구입하지는 않았을 거라며 노부부는 화가 많이 나신 상태였는데요, 두 식구만 사는 작은 집에 공간도 마땅치 않아 헌 김치냉장고는 신발장 옆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기업(대우 클라쎄)에서 부품을 제대로 확보해 놓았거나, 조금만 빨리 찾았더라도 낭비를 막을 수 있었을 겁니다.

이렇게 소비자 개인의 부담 뿐 아니라, 자원낭비로까지 이어지고, 소비자에게 불신감을 심어주는 상황을 기업들은 왜 만드는 것일까. 대기업들은 부품 업체의 도산이나 제품 단종이라는 허울 좋은 변명부터 늘어 놓았습니다. 완제품을 파는 대기업이 부품 업체의 도산 때문에 제품을 못 고친다면 어느 소비자가 '아 그렇구나' 하고 납득을 할까요. 그리고 제품 단종이란 결국 신제품을 팔기 위한 선택일 텐데, 그렇다고 단종된 제품의 수리 의무까지 저버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할 수 없을 겁니다.

                                           


기업들이 말 못하는 진짜 이유는 현금 보상을 하더라도 새 제품을 구입하게 유도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만큼 보상 금액은 적고, 새 제품을 판매할 때 얻는 이윤이 크다는 얘기도 될 테고, 현재 대기업들의 영업과 이윤 창출 구조가 신제품 출시와 판매에 집중돼 있다는 방증일 수도 있습니다. 기술 개발로 끊임 없이 신제품이 출시되고 있는데, 예전 것을 너무 잘 고쳐줘서 10년이고 20년이고 계속 쓴다면 신제품에 투입된 비용을 뽑아내기 힘들다는 겁니다. 억울한 부분도 있겠지만, 부품 노력에 만전을 기울일 이유가 없는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대기업의 행태가 멀리 내다 보지 못하는 경영 철학의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단기 이익 만큼, 짧은 기간 기업의 성장과 유지에는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결국 소비자 불신이 쌓여 어느 순간 매출 자체가 감소할 수 있고, 오히려 반대의 경우 이른바 충성고객을 더 많이 확보해 성장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대기업도 모를 리 없겠지만, 당장 눈 앞의 수익을 내 놓아야 하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만 해 봅니다.

대기업의 자발적인 노력 이외에도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현재로서는 부품 보유에 대한 강제력이 없는 만큼, 보상액을 높이는 것이 기업의 부품 확보 노력을 독려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일 것입니다. 지금의 감가상각 계산법은 딱 부품 보유 기간 만큼을 기준으로 해, 그 이상 사용할 가능성을 무시하고 있는데요, 가전제품의 보상 범위가 길어야 8년 밖에 안된다는 얘기입니다. 고장 나도 언제든 고쳐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그런 대기업 어디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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