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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같은 증거 다른 판결…그 뒷 얘기

- 진정성립이 안 됐다? 위조됐다?

[취재파일] 같은 증거 다른 판결…그 뒷 얘기

사회부 기자는 종종 경찰서 게시판을 들여다봅니다. 내가 모르는 뭔가 있나, 억울한 사람이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나, 게시판 순찰을 돕니다. 특이사항 없음이 대부분이지만, 어 뭔가 이상한데, 촉이 움직일 때도 있습니다. 최근 리포트 한 기사의 뿌리도 경찰서 게시판에 닿아 있습니다. 자유게시판의 평균적인 수준보다 좀 더 차분하고 논리적인 글이 올라와 있던 겁니다. 메일을 보냈더니, 정갈한 답변이 돌아왔습니다. 만나도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글보다 정갈하지 못했습니다. 경찰서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올릴 만큼 가득 쌓인, 케케묵은 억울함을 토해내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6년간 소송을 벌인 사람. 상대방이 경찰을 매수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까지 매수해서, 문서를 위조했고, 자기가 억울하게 무고죄를 선고 받았다고 했습니다. 6년을 넘나드는 사건번호와 소송 스토리가 어지럽기만 했습니다. 실례를 무릅쓰고 대여섯 차례 말을 끊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2시간 동안 귀에 들어온 것이라고는, 본인이 민사재판은 이겼는데, 형사재판은 졌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일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각서 하나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다고 했습니다. 민사에서는 각서를 가짜라고 하고, 형사에서는 각서가 진짜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런 일은 본 적 없습니다. 참, 진짜 희한하네. 판결문을 몽땅 가져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정 씨 가족과 김 씨 가족이 땅을 놓고 벌인 소송. 민사재판에서는 2개의 각서가 등장했습니다. 정 씨 가족은 (김 씨 측이 작성했다는) 각서 갑8호를 내놓았고, 김 씨 가족은 (정 씨 측이 써줬다는) 각서 을9호를 내놓았습니다. 서로 상대방이 써줬다는 각서를 법원에 제출한 겁니다. 물론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내용입니다. 작성 날짜는 1984년 12월 3일, 똑같습니다. 그러나 써준 사람 다르고, 받은 사람 다릅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봐도, 같은 장소에서 두 개의 각서가 동시에 작성됐을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입니다. 둘 중 하나는 가짜일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각서 8호가 진짜라면, 김 씨 측은 주인을 다투는 땅을 정 씨 가족에게 줘야 합니다. 반면, 각서 9호가 진짜라면 달리 생각할 여지가 생깁니다. 문제의 땅에 있는 분묘를 정 씨 쪽이, 1985년 한식일 이전까지 옮기기로 한다는 게 9호 각서의 내용인데, 정 씨 쪽은 2005년에 와서야 이장했으니, 각서에 명시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게 됩니다. 가정을 전제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민사 재판부가 어느 각서를 증거로 채택하느냐에 따라 판결문의 논리와 구조는 바뀌었을 것이고, 땅 주인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민사 재판부는 어떻게 봤을까요. 판결문에서 눈에 띈 문구는,

"을9호증의 작성일자가 갑8호증의 작성일자와 동일한 것으로 기재돼 있으나 ... (여러 정황을 따져봤을 때) 정 씨에게 갑8호증을 작성해준 날 같은 장소에서 을9호증을 교부받았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각서 9호에 대한 불신, 제보자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민사재판에서 9호는 증거로 채택되지 않았습니다. 땅은 정 씨 가족에게 소유권이 넘어갔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각서 9호에 대해 "진정성립이 되지 않는다"고 표현했고, 방송은 '위조'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판결문을 쓸 때와, 기사를 쓸 때, 양측의 논리와 표현은 많이 다릅니다.



우선 대법원 얘기는 이렇습니다.

'위조'라는 표현은 사실과 다르다는 입장입니다. 민사에서는 9호 각서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을 뿐'이라는 얘기. 김 씨가 9호 각서를 내놓았고, 정 씨는 9호 각서가 가짜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각서를 내놓은 김 씨가 9호의 진정성을 입증해야 하는데, 못했다는 겁니다.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9호 각서를 받았다고 믿기 어렵다, 그러니까 8호 각서와 함께 증거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입니다. 정리하면, 민사재판에서는 9호 각서의 위조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는데, 언론이 '위조' 판결을 내렸다고 하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물론, 모순된 판결도 아니라는 뜻이지요.

반면, 방송에서 '위조'라는 표현을 쓴 데도 이유는 있습니다.

사실 "김 씨가 9호 각서를 위조했다"고 주장하면서, 김 씨를 고소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정 씨 가족이자, 경찰서 게시판에 글을 올린 그 남자입니다. 검찰은 이 사람을 무고죄로 기소했는데, 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왔을까요. "각서를 위조했다”고 고소한 부분은 무죄라는 판단이 내려졌습니다. 판결문을 보니까, 민사재판 결과를 보고 각서가 '위조'됐다고 상대방을 고소한 게 수긍이 가더라는 취지입니다. 법정에서 "각서 9호가 위조됐다"고 말해 위증죄 혐의로 기소된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같은 논리로, 언론이 민사 판결문을 보고 '위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상식을 벗어나지 않는 일이라고 봤습니다.

대법원의 반론은 또 있습니다. 한 배석 판사가 2007년 초 민사 판결에서는 각서를 가짜라고 하고, 같은 해 형사부로 옮긴 뒤에는 각서를 진짜라고 판결했다는, 보도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 각서를 '가짜'라고 한 적 없다는 것은 위 논리와 동일합니다. 법원은 여기에 더해, 이 판사의 두 판결이 '전심관여금지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 전심관여금지규정은 쉽게 말해, 제가 1심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어 항소할 경우, 1심 판결을 내렸던 판사로부터 다시 판결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대법원은 민사재판과 형사재판 사이에는 '전심'의 관계가 성립하지 않아, 이 규정을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재심의 필요는 없다는 뜻입니다.

각서 9호에 대한 실체적 진실은 여전히 불투명합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대검찰청은 9호 각서를 두 차례 감정했지만, 위조라는 판단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 씨 측은 민사 판결문을 흔들며 국과수 매수, 경찰 매수, 각서 위조를 주장하고, 김 씨 측은 국과수 감정 결과를 근거로 각서는 진짜라고, 땅을 빼앗긴 것만 억울하다는 입장입니다. 민사 재판은 9호를 증거로 인정하지 않고, 형사 재판은 증거로 인정하고, 각서가 위조됐다며 김 씨를 고소한 사람은 무죄라는 판단을 받고, 소송은 그야말로 6년간의 전쟁, 처음 듣는 사람은 대체 뭔 소리야? 얼키설키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민사에서 이기고 형사에서 진 사람도, 형사에서 이기고 민사에서 진 사람도, 양측은 아직도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복잡한 얘기를 2분의 방송에 담아야 한다는 것은, 언제나 가혹한 일입니다.

기사 원문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081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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