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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살인범은 왜 편지를 보냈을까?

'살인마의 편지' 남은 의문점

[취재파일] 살인범은 왜 편지를 보냈을까?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수사의 대전제로 통하는 이 공식이 좀처럼 적용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베테랑 수사관들이 총력을 기울여 범죄자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만, 결국 '미제사건'으로 묻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5년 전 강원도 화천의 한 산골마을에서 일어난 살인사건도 그랬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마을은 서울서 차로 꼬박 두 시간 반, 그것도 꼬불꼬불 산길을 멀미가 날 정도로 들어가야 하는 곳입니다. 인가도 다섯 채밖에 안 돼 평소 인적이 매우 드뭅니다. 살인사건은커녕 도둑조차 없을 것만 같은 외진 곳입니다.

2007년 10월 23일 밤 이곳에서 끔찍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77살 최 모 할머니는 여느 때처럼 집에서 혼자 하루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은 연대장을 지내고 전역한 큰 아들이 부대 근처에 마련해준 것으로, 자녀들이 이따금 오갈 뿐 평소엔 할머니 혼자 지냈습니다. 도로 문제로 잠시 갈등을 겪었던 교회 목사 부부를 제외하곤 마을사람들과 사이도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정체불명의 방문객이 최 할머니를 찾아와 냄비와 돌로 머리를 13차례나 가격해 숨지게 했습니다. 경찰은 그 잔인함 때문에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하고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4월까지 약 6개월 동안이나 수사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습니다. 범행도구인 냄비는 깨끗이 세척돼 지문이 남지 않았고, 할머니 손에 남은 몇 가닥의 머리카락도 모낭이 없어 DNA 채취가 불가능했습니다. 인적이 드물어 목격자도 찾을 수 없었고, 마을주민들의 알리바이도 완벽했습니다. 수사는 잠정 중단되고, 사건파일은 미제사건함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5년이 흘렀습니다.

2011년 11월 사건 발생 5년만에 강원경찰청 미제사건전담반이 이 사건파일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사건 당시엔 찾을 수 없었던 살인범의 흔적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그 흔적은 사고 직후부터 할머니의 집에 배달되기 시작한 7통의 협박편지. '화천의 이만성'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보낸  이 편지는 살인범이 보냈을 가능성이 높다고 경찰은 판단했습니다.
                   

2007년 11월 5일, 첫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살인사건이 발생한 지 열흘쯤 지났을 때였습니다. 편지는 그 후로 지난해 1월까지 짧을 땐 두 달, 길 땐 1년 반 간격으로 배달됐습니다. 이 편지에 따르면 이만성은 할머니와 동년배로, 한때 할머니와 연인 관계였으나 할머니의 변심으로 외면당한 남자였습니다. 할머니가 군인들에게 몸을 팔았다는 비난조의 내용까지 적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이 사실관계를 확인한 결과 이 모든 내용은 거짓으로 밝혀졌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을 놓고 왜 이런 험담을 한 걸까. 경찰은 유일한 단서인 편지를 통해 살인범의 뒤를 쫓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편지에 찍힌 우체국 소인부터 추적했습니다.

2008년 12월 11일 살인범이 사북우체국에서 우체통에 편지를 넣는 모습이 찍힌 CCTV도 확보됐습니다. 화질이 너무 흐려 신원을 확인할 순 없었지만,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70대 할머니와 동년배가 아니라 아직 환갑이 안 된 중장년이라는 겁니다. CCTV 속 살인범은 허리가 꼿꼿했고, 팔자걸음으로 걸었으며 항공점퍼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습니다.
                   

 

단서는 또 있었습니다. 7통의 편지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름이 딱 하나 있는데, 할머니 존함이 아니라 할머니 장남의 이름, 김영호(가명)라는 겁니다. 즉, 할머니와 연인관계였던 것처럼 위장하고 있지만 실은 장남의 지인일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편지에는 장남 김영호 씨에 대해 "이 괘씸한 놈아", "한번 만나자" "한번 만나 얘기해보자" "너와 얘기하고 싶다. 이제 나도 꼬부라져 간다. 정으로 살자" 등의 표현이 있었습니다. 애초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의 장남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한 범행이었던 겁니다. 자신에게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을 떠올리지 못하던 장남 김영호(가명) 씨는 결국 편지 내용 속에서 20년 전 희미한 기억을 끄집어냈습니다.

1993년 김 씨가 모 부대 연대장으로 복무하던 시절, 명령 불복종으로 인사조치를 당한 조모 부사관. 조 부사관은 인사조치에 항의하며 사표를 제출했고, 이 사표는 그대로 수리됐습니다. 경찰은 잠복수사를 벌인 끝에 조씨가 마시다 버린 음료수 캔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분석을 의뢰했습니다. 국과수가 음료수 캔에 남은 DNA와 협박편지 우표에 남은 DNA를 대조한 결과는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하마터면 완전범죄로 묻힐 뻔 했던 사건이 풀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의문은 남습니다. 살인범은 자신이 노출될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왜 편지를 계속 보낸 걸까. "범죄도 커뮤니케이션 방식 중 하나"라는 시각으로 보면 그의 행동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요. 조씨는 경찰 조사에서 "20년 전 내가 억울한 마음에 사표를 냈는데, 연대장이 이걸 그대로 수리해버렸다"며 할머니의 아들에 대한 식지 않은 원망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할머니를 찾아가 아들의 소재를 묻던 중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질렀지만, 살인범은 아직 할 얘기를 다 못했던 겁니다. 처음엔 수사방향을 흐리기 위해 할머니와 연인관계였던 것처럼 썼지만, 정작 아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는 본심은 숨길 수 없었던 겁니다.

결국 그는 20년 전 못다 풀었던 응어리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 편지를 보내고, 또 그 때문에 결국 꼬리를 잡혀 검거됐습니다. 법적으론 우표에 묻은 DNA 때문에 검거됐지만, 본질적으로 그 모든 일이 벌어진 건 살인범의 가슴 속에 응어리진 이야기 때문입니다.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기고, 동시에 메시지(이야기)를 남긴다고도 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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