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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하카토모'와 '슈카츠'

남은 인생을 설계하는 일본 노인들

[취재파일] '하카토모'와 '슈카츠'

지난 해 말 일본에선 한 60대 가장의 죽음을 그린 '엔딩 노트'라는 영화가 상영됐습니다. 정년 퇴직한 아버지가 암을 선고 받고 삶을 정리해 가는 과정을 딸의 시각에서 그린 90분짜리 다큐입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엔딩 노트'는 사실 일본에서 지난 2004년부터 판매가 되기 시작한 '엔딩 노트'와도 동일합니다. 자신의 가족관계에 상속문제, 유언 등을 여백에 직접 적을 수 있도록 만든 책인데 일본에선 스테디 셀러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직 건강한데 왜 기분 나쁘게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하냐는 것이 일반적인 의식인데 반해 일본에선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대비하는 노인들을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일본의 가족 형태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는데요, 일본의 가정 가운데 한 명으로만 이뤄진 독신세대가 전체 가정의 32%를 차지하고 자녀가 없이 부부로만 구성된 세대도 20%에 달합니다. 전체 가정의 절반 이상이 본인 또는 부부가 사망한 이후 장례를 처리하거나 재산을 정리해 줄 마땅한 사람이 없는 셈입니다.

기자가 만난 61살의 일본 여성은 할머니라 하기엔 너무나 젊고 활기찬 모습이였습니다. 퇴직한 남편과 단 둘이 살고 있었는데 노령연금과 후생연금, 퇴직연금 등을 합치면 1년에 4, 5백만 엔 정도의 수입이 생긴다고 하더군요. 매일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있고 실버 대학에서 공부도 하고 가끔 해외 여행도 다니는데 최근엔 한국 여행을 자주 가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있는 셈이지만 부부가 사망했을 때를 생각하면 걱정이 된다고 했습니다. 장례식이며 묘지며, 재산의 처분까지 믿고 맏길 사람이 없다는 것이죠. 때문에 미리 엔딩 노트를 작성해 두었다더군요. 장례식은 하지 말 것과 죽은 뒤엔 미리 정해 둔 나무 주변에 화장한 뒤 뿌려 줄 것, 남은 재산은 사회에 기부할 것 등을 엔딩 노트에 적어 두고 이를 처리해 줄 시민단체 성격의 엔딩 센터에 등록까지 마쳤다고 합니다.

이 엔딩센터엔 이런 노인들 천6백 명이 현재 회원으로 가입 중인데 같은 나무에 뿌려질 사람들끼리 같이 어울리고 여행도 다니고 말 동무도 하는 '하카 토모'로 지낸다고 합니다. '하카 토모'는 우리 말로 하면 무덤 친구 정도 될텐데요, 수목장을 선택한 사람들끼리 친구가 되는 것은 노인들이 고독한 나라 일본에서만 볼 수 있는 새로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최근 새롭게 등장한 개념이 바로 '슈카츠'(종활)입니다. 우리 말로 하면 '끝내는 활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인생의 종말을 제대로 준비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자녀에게 혼란을 주지 않겠다는 일본인 다운 '준비성'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엔딩 노트가 스테디 셀러가 된 것도, 각 금융회사에서 주최하고 상속과 유언장 작성 등에 대해 설명하는 종활 세미나에 노인들이 몰리는 것도 모두 종활의 하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활동들이 활발한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 고령자층이 상당한 소비 잠재력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요, 60대 이상 세대가 일본 내 가계 자산의 60%를 보유하고 있고 전체 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44%나 되기 때문입니다.

한국도 세계 최고의 저출산에다 핵가족화가 심화되고 일본 못지않게 고령화에 접어들면서 일본과 사정이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에 언젠가는 일본 내에서 불고 있는 이런 현상들이 재연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노년층의 이런 모습을 들여다 볼수록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건강하고 여유 있게 퇴직 후의 삶을 즐기면서 죽음 이후의 일까지 걱정하고 있는 일본 노인들이 부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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