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2월 13일 10시30분 주한 일본대사관 앞
수많은 취재진들이 일본대사관 앞에 있는 소녀상에서 한 일본인 할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주인공은 올해 81살인 노무라 모토유키. 목사인 그는 자신을 목사님보다는 그냥 할아버지라 불러주길 바라는 조그마한 노인이었습니다.
10시 40분이 조금 넘은 시각, 택시에서 그가 내렸습니다. 수많은 취재진들이 모인 것을 보고 놀랐는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습니다. 취재진 사이를 지나 소녀상 근처에 선 할아버지는 날씨가 쌀쌀했는데도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습니다. 그리고 주섬주섬 가방속에 있는 플루트를 꺼내 들었습니다. 잠시 후 일본 대사관 앞에는 80이 넘은 일본인 할아버지가 연주하는 '봉선화'가 울려 퍼졌습니다. 수없이 터지는 카메라 후레쉬소리에 처음에는 묻혔던 애잔한 멜로디가 점점 가슴속에 꽂혀왔습니다. 할아버지의 숨결도 거칠어지고 손끝도 떨려왔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연주를 마치면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해 세워진 소녀상 앞에서 한 일본인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흐느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연주한 홍난파의 '봉선화'를 이렇게 해석했습니다. "노래 가사 중 가을바람은 일본의 침략이고 그 바람으로 꽃이 떨어진 겁니다. 그리고 그 꽃 중에는 일본군 위안부들이 있는 겁니다." 할아버지는 힘든 몸을 이끌고 일본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미안함을 전하기 위해 그렇게 소녀상 앞에서 플루트를 연주했습니다.
대체 이 할아버지는 누구일까. 청계천이 개발되면서 만들어진 청계천역사박물관에 가보니 할아버지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1968년에 제주 방문때 처음 한국에 온 노무라 할아버지는 당시 한국 빈민들의 모습을 보고 선교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아주 예쁘게 단장된 청계천이 빈민촌이었던 70년대에 노무라 할아버지는 청계천에 교회를 세우고 서독의 재정지원까지 받아 탁아소를 만드는 등 빈민구제활동을 펼쳤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청계천역사박물관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직접 찍은 5천장이 넘는 사진들이 청계천의 소중한 역사자료로 박물관 창고 한쪽을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박물관 관계자는 개인으로서는 정말 엄청난 양의 역사적 자료를 남겨 주신 거라며 청계천 역사를 조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자료라고 할아버지의 노력을 평가했습니다. 사진을 몇 장 넘겨봤습니다. 1979년생인 저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모습의 청계천을 봤습니다. 판자촌, 헐벗은 아이들, 가난과 병에 찌든 빈민의 모습. 70년대 국내에서는 아무도 돌보지 못했던 그들에게 노무라 할아버지는 도움의 손길을 뻗었던 겁니다.
그런 할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행동'을 취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소녀상 앞에서 연주 도중 왜 눈물을 흘리셨냐는 기자에게 면박까지 주면서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보상을 했다고 하지만, 당시 협상은 힘의 불균형 관계에서 맺어진 것이다. 그냥 막걸리 마시면서 그냥 그렇게 하자고 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일본은 한국에서 위안부 문제를 분명하게 해결하지 못했다. 일본이 희생자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일본시민으로서 정말 죄송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죽기 전에 연주하고 싶었다."고 자신의 생각을 거침없이 이야기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연주를 마치고 조용히 일본대사관을 방문할 계획이었습니다. 일본대사관에 가서 일본 시민으로서 일본대사관에 일본의 침략으로 인한 희생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조용히 자료를 요청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너무 많아 일본대사관으로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현장에서 만난, 그리고 따로 만나서 1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눈 노무라 할아버지는 양심 있는 일본인임엔 틀림없었습니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할아버지의 인식에서 희생자에 대한 종교적인 연민과 일본 우월주의가 다소 느껴지기는 했지만, 사실에 근거해서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행동으로까지 옮길 수 있는 용기 있는 할아버지였습니다. 특히, 현재 우익의 힘이 지배하고 있는 일본사회의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보여준 용기 있는 행동에 큰 박수를 보내드리고 싶었습니다.
인터뷰 내내 언론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인터뷰가 거의 끝날 때 쯤, 가지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줬습니다. 새벽녘에 찍은 그 사진 속 하늘에는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비행기였습니다. 할아버지가 사는 일본 집에서는 하루에 30번 정도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를 볼 수 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순간 한국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비행기를 볼 때 마다 한국 친구들과 할머니들, 그리고 아이들을 생각합니다." 그리고선 좀처럼 웃지 않던 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