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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소통, 어렵지 않아요"

판사님이 한 번 만나주면...

[취재파일] "소통, 어렵지 않아요"
2월 6일. 서울 중앙지법 1층 대강당. '소통 2012 국민 속으로'라는 제목으로 법원이 행사를 열었다.  좀 더 세련된 행사 제목을 붙일 수는 없었는지 아쉬웠지만  법원답게 고지식하고 딱딱한 제목이어서 오히려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었다. '부러진 화살'이 뜨고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목소리가 나오니 만들어진 '뒷북' 행사라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이 행사는 11월부터 예정돼 있었고, 법원은 계획대로 진행했을 뿐이다. 법원 입장에서는 억울할만도 한 상황이었다.

이 날 행사에 참석한 패널들은 조국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 미술관 옆 동물원과 집으로 등의 영화로 유명한 이정향 감독 등 이었다. 패널들은 점잖은 내용과 자료를 통해 사법부를 '적당히' 비판했다. 권위주의와 '불통'에 대한 문제를 지적했는데 이미 예상했던 모범답안이었던 만큼 큰 감동 보다는 적당히 '따끔한' 정도의 내용이었다. '부러진 화살'의 내용이 사실인지를 떠나서 법원이 국민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절차적 정의보다는 결과적 정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하지만 이 날 행사의 진정한 주인공은 법원에 대해 '피를 토하는 듯한' 절규를 뱉어낸 일반 시민 참가자들이었다. 원초적 육두문자는 기본. 점잖은 법원에서 고성이 난무하는 상황이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진짜 소통을 위해 마수걸이 '한판'을 한다는 느낌이었다.

아들의 영정사진을 들고 연단으로 돌진한 아버지가 있었다. 의료 사고로 촉망받던 경찰대생 아들을 잃었고,  그 억울함을 민,형사 재판을 통해 제대로 풀지 못한 듯 보였다. 아버지의 '용감한' 돌진이 있자, 여기저기서 법원과 판사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사기꾼, 도둑놈" 원색적인 단어가 수없이 튀어나왔고, 너도나도 하고싶은 말이 너무 많아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무슨 얘기인지 도대체 들을 수 없었다.

"오늘 행사 물건너가나?" 시작부터 진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막상 행사가 시작되자 그런대로 무난하게 흘러갔다. 물론 중간중간 야유도 있었고, 법원을 비난하는 내용에 대한 환호도 있었지만 행사는 합격점을 줄만했다. 시민과의 대화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언제쯤 나도 한마디 하나 기다리고 있던 시민 참가자들은 발언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웃옷을 벗어던지며 육탄돌진까지 했다. 결국 이들에게 마이크가 돌아갔고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각자의 사연을 한마디씩 하며 법원과 법관들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패널들 만큼 정제된 얘기가 아니라 두서가 없었다. 당연히 내용을 정리하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들의 얘기는 기록으로 남지도, 기사에 실리지도 않았다. 고함치는 모습이 '말'이 아닌 '소리'로 담겨 방송 뉴스에 실릴 뿐이었다.

제약된 시간에 얘기를 다 못한 사람들은 행사장 입구에서 방호원들에게 화풀이를 하면서 거칠게 항의했다. "이럴 거면 뭐하러 소통하겠다고 행사를 하고 생색내냐?" 30분넘게 이어지던 소동은 법원장이 준비한 다과회 자리에 함께 가자는 제안이 있고 나서야 멈췄다. 이 사람들이 법원장과 판사들을 직접 대면하면 어떤 사고가 일어날까 걱정이 앞섰지만 기우였다.

오히려 방금전까지 난동에 가까웠던 모습은 사라지고 '순한양'이 됐다. 법정에서 올려다보기만 했던 판사들이 자신의 눈 앞에서 조용히 얘기를 들어주자 오히려 차분한 모습이 됐다. 그냥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 말이다. 이 날 행사의 핵심은 화려한 패널들의 프리젠테이션도, 법원의 다짐과 성과 발표도 아닌 다과회였다. 할 말 많은 '악성 민원인'으로만 생각했던 사람들의 얘기를 막상 들어주니 더이상 '악성 민원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역시 소통의 기본은 듣는 거였다.

다과회 자리를 지켜보면서 처음부터 법원의 판사들이 여러명 나서 연단이 아닌 행사장 아래에서 이들의 얘기를 들어주는 자리를 마련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원을 해결해주지는 못해도 그냥 들어주기만이라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탁월한 외모도 아니고 능력이 출중한 것도 아닌데 이성에게 인기가 많아 '선수'의 반열에 오른  친구가 떠올랐다. 그 친구의 비결은 만나는 여성이 하는 말을 그대로 '복명복창'하면서 들어주는 것이라고 한다.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해 주는 건 기본이란다. 재미있는 사실은 처음에는 '작업기술'로 생각했던 이런 행동을 계속하다 보니 실제로 그 여성의 얘기에 집중하게 되고 깊은 이해를 할 수 있었다는 거다.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어떤 상황이든 똑같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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