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몇 가지 일들 가운데 한나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이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돈 봉투 의혹' 사건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만 일단 돈 봉투가 오간 것 자체는 객관적으로 드러난 사실이니 돈 봉투 사건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의혹은 누가, 무슨 돈으로, 어떤 경위로 돌렸느냐는 부분이고 검찰도 그런 대목들을 수사하고 있지요.
현역인 고승덕 의원의 공개로 세상에 이 사건이 알려진 뒤 구의원들에게 2000만 원을 살포하라고 지시한 혐의로 한나라당 당협위원장인 안병용 씨가 구속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박희태 국회의장의 측근들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지요. 그런데 설 연휴가 막 끝난 지난 25일, 갑작스레 희한한 보도자료가 나왔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이 사건과 관련해 자신들의 실명과 사진, 동영상이 보도되는 것을 문제 삼으면서 자신들의 실명을 명시한 보도자료를 냈다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여비서까지 말이죠. 보도자료는 기사를 써달라고 내는 자료인데, 그럼 실명과 사진을 밝혀도 되나? 적잖이 궁금해지는 대목입니다. 어쨌든, 이분들이 제기하는 명예훼손과 초상권 침해 주장은 일리가 있는 걸까요? 나름 언론법에 관심이 많은지라 잠시 고민을 해봤습니다. 당시 이들이 거론되는 기사도 찾아봤습니다. 대표적으로 연합뉴스 기사를 인용합니다.
내용은 박희태 의장 캠프 관계자가 돈 봉투를 돌린 사건의 경위를 박 의장의 핵심 측근인 이들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검찰이 여비서 함 모 씨부터 소환해 조사하기로 했고 두 명의 수석비서관에 대해서도 소환 일정을 조율할 방침이라는 겁니다. 함 씨는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보도자료'가 발표된 당일인 지난 25일 조사를 받았고 오늘(30일)은 이봉건 수석이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들이 이번 돈 봉투 사건에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을 거라는 보도 내용이나 검찰이 이들을 소환해 조사할 거라는 내용은 모두 사실인 셈입니다.
조사가 진행 중인 사건은 현직 국회의장인 박희태 의원이 집권당인 한나라당의 당 대표로 선출되는 과정에서 박 의장 캠프 관계자가 유권자인 대의원들에게 돈 봉투를 돌렸다는 겁니다. 실정법에 어긋나는 범죄일 뿐만 아니라 현직 국회의장이 검찰 수사 선상에 오른 대단히 공적인 사안입니다. 이런 사건에 대한 보도는 '공익'을 위한 것이지 누군가를 비방하기 위한 것으로 인정되기는 어렵습니다. 개인의 인격권 보호도 중요하지만 이런 공공의 관심 사안에 대해서는 언론의 자유를 폭넓게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일관된 판례입니다.
물론 공익적인 목적으로 사건 자체를 보도하더라도 관련된 당사자의 실명이나 사진을 꼭 공개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건 자체는 보도하더라도 익명 보도로도 충분히 그런 사건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으로 높이고 대책을 강구하게 하는 등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굳이 실명과 사진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 또한 확립된 판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는 실명과 초상을 공개하고 어떤 경우는 공개하지 않아야 할까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은 당사자가 공인이냐는 겁니다. 공인이라면 사회적으로 공적인 신분에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공무원만이 아니라 각계의 유명 인사들이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경제인, 예술인, 시민단체 핵심 관계자, 중견 언론인 등도 여기에 해당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건 역시 공무원인데 모든 공무원이 공인이 되는 것은 아니고 직급과 직책, 갖고 있는 권한의 크기(즉, 재량권) 등으로 공인 여부를 판단합니다. 선출직이나 정무직 공무원은 거의 모두 공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경찰관과 같은 법 집행 공무원은 거의 전부가, 그리고 일반직 공무원의 경우는 6급인 부면장을 공인으로 본 헌법재판소 판례가 있습니다. 상당히 공인을 폭넓게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시 이번 사건으로 돌아가 봅니다. 기사들을 찾아보니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의 수석 비서관들은 1급 공무원입니다. 행정부로 치면 차관보급입니다. 차관급 바로 아래의 고위 공직자입니다. 구체적으로는 3부 요인인 국회의장의 정무적, 정책적 판단을 보좌하는 핵심 측근들입니다. 이들을 공인이 아니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물론 박 의장 여비서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굳이 성을 밝힐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느 언론도 여비서의 이름을 모두 밝히지 않았고 사진도 모자이크 처리한 것을 썼습니다. 다만 이 분의 경우도 그냥 '여비서'가 아니라 공식 직책이나 직급, 맡은 역할 등에 따라서는 실명과 초상을 공개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언론 보도에서 ‘보좌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정확한 직책이나 직급은 확인해보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봉건, 조정만 두 수석비서관의 경우는 이번 사건에 대한 일반적인 보도를 두고 명예훼손 운운하거나 초상권 침해를 주장할 여지가 별로 없는 셈입니다. 그런데 이분들은 왜 그런 주장을 하며 보도자료까지 냈을까요? 아마도 이런 형사 처벌과 소송의 위협이 조금이라도 자신들에 대한 보도를 위축시키는 효과를 낼 거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고위 공직자들이 이처럼 고소와 소송 제기를 위협 수단으로 사용하면 언론은 일단 조금 더 조심하기 마련입니다. 어지간하면 이런 일에 말려들고 싶지 않으니까요. 이런 걸 두고 '위축 효과' (Chilling Effect)라고 부릅니다. 언론 보도를 막으려고 고위 공직자들이 공세적으로 내는 소송을 두고 '봉쇄 소송'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들이 실제로 앞으로 형사적으로 명예훼손을 주장하거나 민사 소송을 낼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다면 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적어도 지금 드러난 사실관계만 놓고 봐서는 이기기 쉽지 않을 겁니다. 제가 굳이 이 글을 쓴 이유는, 이 정도의 고위 공직에 있는 분들이, 더구나 오랫동안 박희태 의장 주변에서 정치 활동을 해 온 분들이 국회의장의 검찰 소환까지 거론되는 이런 중대한 상황에서 '형사상 명예훼손', '초상권 침해' 운운하며 언론을 위협하는 모양이 너무 황당해서입니다. 이런 분들을 위해 명예훼손 관련 판례의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참고가 됐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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