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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길(Gillard)데렐라'의 잃어버린 구두

[취재파일] '길(Gillard)데렐라'의 잃어버린 구두

임상범 기자 doongle@sbs.co.kr

작성 2012.01.28 17:48 수정 2012.01.29 01:57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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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와 계모의 딸들에게 구박 받으며 부엌일에 시달리던 착한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무도회에서 멋진 왕자님과 춤을 춥니다. 하지만 밤 12시가 되어 도망치듯 집으로 돌아오다가 신고 있던 유리 구두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아름다운 신데렐라를 잊지 못한 왕자님은 유리 구두의 주인을 아내로 삼겠다고 발표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동화 <신데렐라>의 내용입니다. 신데렐라 동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무대는 호주 캔버라의 한 레스토랑. 신데렐라 역은 호주 최초의 여성 총리인 줄리아 길러드 총리가 맡았습니다. 길러드 총리는 1788년 영국인들이 호주에 처음 도착한 걸 기념하는 '호주의 날' 행사의 하나로 '자랑스러운 호주인'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찾았습니다. 국경일 행사인 만큼 야당인 자유당 당수 토니 애보트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애보트 당수가 갑자기 원주민인 애버리진(Aborigine)들을 겨냥해 독설을 쏟아 낸 겁니다. 원주민들은 인종차별에 항의해 40년 전부터 캔버라 의사당 근처에 '천막 대사관'을 설치했는데 애보트가 이 천막 대사관이 철거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겁니다. 이 망언을 전해 듣고 흥분한 애버리진 수백 명이 행사장으로 몰려 들었고 애보트 당수는 물론, 짝 잘못 만난 죄로 길러드 총리 역시 30분이나 감금 아닌 감금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경호 요원들이 시위대를 뚫고 간신히 길을 트자 길러드 총리는 멋진 보디가드의 품에 안기다시피해서 줄행랑을 쳤는데 어찌나 다급했던지 대피 도중 신고 있던 하이힐 한 짝이 벗겨졌지만 미처 챙길 틈조차 없었습니다. 현장에 남겨진 오른쪽 검은색 하이힐은 애버리진들의 차지가 됐습니다.

애버리진들은 길러드 총리에게 일주일 안에 구두를 찾으러 오지 않으면 이베이 경매에 부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페이스북에는 "빼앗긴 원주민의 땅과 총리의 구두를 맞바꾸자"는 주장도 올라왔습니다. 에버리진들이 바라는 것은 총리가 구두를 찾으러 오는 길에 자신들과 원주민들의 권익 행사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한번 해보자는 것일 겁니다. 길러드 총리는 아직 원주민들의 제안에 가타부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길러드 총리는 애버리진들과 깊은 인연이 있습니다. 1961년 영국 남서부 웨일스의 배리에서 광부의 딸로 태어나 5살 때 부모를 따라 호주로 건너온 길러드 총리는 최근 이민자 출신입니다. 18세기 호주 땅에 정착하며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변방 보호구역으로 내몰았던 '침략자' 초기 백인이민자는 아니었지만 원주민들에게는 길러드 역시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멜버른대학 법대를 졸업하고 이민과 노동 분야 변호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길러드는 우리 나라로 치면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얻어 정계로 진출했습니다. 원주민인 애버리진들의 권익과 관련된 업무나 재판에도 관여했습니다. 그런 경력을 바탕으로 2001년부터 2005년까지는 야당인 노동당 예비내각에서 이민 담당 장관과 애보리진 담당 장관을 맡았고 2010년 6월 최초의 여성 총리 자리에 올랐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호주 전체 인구의 2%를 차지하는 애보리진들은 길러드의 든든한 지지세력이었을 겁니다.

AUSTRALIAN ORIGIN의 줄임말인 애버리진(Aborigine)으로 불리는 호주 원주민들은 호주의 뿌리깊은 백호 사상때문에 뉴질랜드 마우이족과는 달리 박해와 설움을 겪어왔습니다. 호주 정부는 이들을 특별구역에 몰아 넣고 마치 살아있는 관광상품처럼 취급해 왔습니다. 1967년까지만 해도 아예 인구조사에 포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원주민 자녀들을 가난한 부모들에게서 떼어내 좋은 조건에서 양육한다는 명목으로 고아원에 방치하기까지 했습니다. 교육수준도 낮고 정부 지원금 없이는 생계 유지도 어렵다보니 범죄율만 높아져 호주 전체 수감자의 25%가 이들 에버리진입니다. 그래서 애버리진들을 이름하여 '빼앗긴 세대 (Stolen Generation)'라고도 부릅니다. 그나마 길러드 총리가 소속된 노동당이 1997년 '빼앗긴 세대'의 수와 상황을 발표하며 현 정부가 공식사과할 것을 주장하면서부터 이들은 그동안 빼앗겼던 권리를 하나하나 되찾아 가고 있는 과정입니다.

자~ 신데렐라, 아니 길러드 총리는 잃어버린 구두 한 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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