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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버핏의 여비서는 왜 워싱턴에 왔을까?

[취재파일] 버핏의 여비서는 왜 워싱턴에 왔을까?

임상범 기자 doongle@sbs.co.kr

작성 2012.01.26 09:12 수정 2012.01.26 09:21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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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1월 이맘때면 워싱턴 상하 양원합동회의에서 미국 대통령은 'State of the Union', 즉, '국정 연설'을 해오고 있습니다. 한 해 동안 미국 행정부가 취해나갈 국내 정치, 외교, 경제 운용 방향을 제시하면서 미국 국민들과 각 정파의 지지와 단결을 호소하는 자리입니다.

연설자인 대통령의 입에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눈이 쏠리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세인들의 관심을 끄는 게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다름아닌 이 연두 국정연설에 상하원 의원들과 정부 각료들 말고 누가 특별 방청객으로 초대받느냐는 것입니다. 레이건 정부 시절인 1982년, 추락한 항공기에서 승객을 구해낸 레니 스쿠트니크를 국정 연설에 방청객으로 초청한 이래, 전통적으로 국정 연설을 앞두고 영부인이 초청한 특별 방청객 명단을 발표하는데, 이 특별 방청객은 대통령 부인과 나란히 앉아서 대통령의 국정연설을 듣는 영광스런 기회를 얻게 됩니다. 달리 보자면 대통령이 자신이 국민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을 방청객으로 초대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대선이 있는 2012년 미국 연두 국정 연설에는 어느 인물들이 영광의 방청객으로 초대 받았을까요? 영부인 미셸 오바마의 앙 옆에는 고인이 된 스티브 잡스의 부인 로런 파월 잡스와 애리조나 총격 사건으로 머리에 총상을 입었던 가브리엘 기퍼스 하원의원의 남편인 우주비행사 마크 켈리가 이번 대선 승부를 가를 노스캐롤라이나, 펜실베이니아, 미시건, 버지니아 등 이른바 '스윙 스테이트' 쪽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앉았습니다. 하지만 이들을 압도하고 언론의 가장 많은 스포트 라이트를 받은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억만장자 워런 버핏의 '여비서'인 데비 보사네크였습니다.

              

버핏도 아닌 버핏의 여비서가 왜 이 자리에 초대받았을까요?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 내용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금방 알아 차릴 수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오늘 국정 연설은 '공정'과 '평등'을 기치로 내세운 대선 선거 유세를 방불케 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위로부터 아래까지 똑같은 규칙을 적용받고, 누구든 열심히 일하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면서 공화당을 부자정당으로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면서 일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버는 고소득자의 세율을 최소 30%로 하는 이른바 '버핏세'를 도입하겠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52조 원의 자산을 가진 세계 3번째 부자 버핏은 지난해 자신이 연방정부에 소득세로 낸 세금이 고작 '693만8천744 달러'(한화 약 76억3,200만 원)에 불과했다면서 더 내고 싶어도 현행 세법상 더 낼 수도 없다며 의회에 서둘러 세제개혁안을 만들라고 촉구했습니다. 버핏은 "내가 낸 세금이 엄청난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세금부과대상인 내 소득의 17.4%에 불과하다"면서 "내가 고용한 직원들이 납부한 소득세를 살펴보니 33%에서 많게는 41%까지 세금을 내고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그러면서 버핏은 자신의 소득세율이 여비서보다 낮다고 실례를 들었는데이 과정에서 여비서인 데비 보사네크의 실명을 거론했습니다.

이런 버핏의 주장에 부자 증세를 통해 재정적자를 메우고자했던 오바마 대통령이 '맞장구'를 치면서 미국 정치권에서는 때아닌 '버핏세' 논란이 뜨겁게 일었습니다. 버핏세가 '뜨거운 감자'가 되면서 덩달아 여비서 데비 보사네크는 금새 전국적인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여비서! 영어로 'Secretary', 주인의 재산 등 비밀(Secret)스런 업무를 다루는 최측근 인사를 뜻합니다. 미국의 국운이 걸린 긴밀한 업무를 다루는 워싱턴의 장관들을 'Secretary'라고 부르는 것도 우연이 아닙니다.

버핏의 'Secretary' 데비 보사네크에 관해선 알려진 것이 많지 않습니다. 나이는 50대 중반. '투자의 달인' 워런 버핏의 비서로 일한 지 20년이 넘은 그녀는 예의 바르고 유능한 버핏의 '문지기'로 알려져 있지만 버핏의 '버크셔 해서웨이' 사무실이 있는 네브라스카주 오마하가 워낙 시골 촌구석이라 연봉은 많아야 5, 6만 달러에 불과할 것으로 사람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장관(Secretary)들의 연봉과는 꽤나 차이가 날 겁니다. 하지만 이번 일 덕분에 여비서라는 직업은 '유리지갑'으로 상징되는 중산층의 대표직업으로 확실히 자리 매김했습니다.

오바마는 이 시골 출신 여비서가 지켜보는 가운데 오늘 국정연설의 하이라이트를 이렇게 장식했습니다. "버핏세를 계급투쟁이라는 사람들(공화당)도 있지만, 미국인들은 억만장자가 적어도 여비서만큼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것을 상식이라고들 말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부자증세안, 즉 '버핏세'를 관철시키기 위해 버핏의 여비서를 특별 초청한 것입니다.

공화당 등 미국 정치권 일각에선 경제위기를 수습하지 못해 재선가도에 빨간불이 켜진 오바마가 다급한 나머지 버핏의 여비서를 끌어들여 부자들을 몰아세우며 포퓰리즘에 기대려고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에서 분배 문제가 대선 국면을 주도할 핵심 이슈로 등장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총선과 대선이 연이어 잡혀 있는 우리나라 선거판에서도 아마도 비슷한 양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바람이 있다면 하루빨리 경기가 회복되고 분배의 정의가 제대로 실현돼 비서(Secretary)도 장관급(Secretary)의 보수를 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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