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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반성 없는 SK, "최 회장이 497억 원 없어 횡령했겠나"

불구속 기소된 최태원 회장, 법원은 어떤 결정을 할까

[취재파일] 반성 없는 SK, "최 회장이 497억 원 없어 횡령했겠나"
지난 5일 최태원 SK 회장이 SK 계열사 자금 636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습니다. 이로써 지난 11월초 SK 그룹 압수수색으로 검찰이 공개수사를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에 사건은 일단락된 듯 합니다.

다음날 아침 조간 신문을 보다가, 눈을 뗄 수 없는 제목의 기사를 봤습니다. 검찰이 최 회장을 불구속 기소한 데 대해 SK그룹이 "주식 1조 원 어치를 가진 최 회장이 497억 원이 없어서 횡령했겠냐"며 "최 회장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충분히 소명했는데도 기소를 해 '유감'"이라고 반박했다는 겁니다.

"유감"이라니요. 대기업 오너들의 경제 범죄 수사가 끝나면 보통 "물의를 끼쳐 죄송하고 앞으로 투명경영을 위해 노력하겠다" 정도의 립서비스가 나왔던 게 통상의 기대 수준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 회장은 개인 선물 투자에서 계속 손실을 보자 그 빚을 메꾸기 위해 회사의 공금에 손을 댄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그랬으니, 선물 투자로 이득을 본 것도 없으니, 부당 이득으로 얻은 사재를 출연해 사회 공익 사업에 쓰라는 말은 못할 상황입니다. 더욱이 SK그룹의 경영상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회장의 '개인 범죄'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검찰의 불구속 기소 결정에 대해 그룹 차원에서 '유감' 이라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최 회장의 수사 상황을 직접 취재한 입장에서는 SK의 주장보다는 검찰의 수사 결과를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번 수사는 최 회장과 (제 생각엔, 최 회장 대신) 구속된 동생 최재원 부회장 등 주요 피의자들의 '입'에 의존한 수사가 아니라, 철저히 객관적 물증을 가지고 한 수사였습니다.

검찰은 지난해 3월 글로웍스 주가조작 사건을 수사하던 중, 관련 회사인 베넥스 인베스트먼트를 압수수색하다 '최태원·최재원 선물 옵션 투자 흐름표'를 발견했습니다. 이번 SK 수사의 결정적 단서였습니다. 검찰은 경제에 미칠 파장을 우려해 조용히 계좌추적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줄기차게 SK 기사를 쏟아냈지만, 검찰은 지난해 11월 공개수사로 전환하기 전까지 '확인'을 해주지 않아서 검찰 출입 기자단의 원성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검찰은 몇달간 투자 흐름표를 바탕으로 2천 개가 넘는 계좌, 들어오고 나간 돈의 합계 25조 원이 넘는 거대한 퍼즐을 맞춰 나갔습니다.   

그 결과는 이렇습니다. 지난 2008년 옵션 투자 등으로 수천억 원대 빚을 지게 된 최태원 SK 회장은 본인의 상장 주식을 모두 담보로 잡히면서, 제1 금융권에서는 더 이상 신용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최 회장은 동생 최재원 부회장과 함께 빚 청산 계획을 세우고, 동생과 제3자 명의로 제2금융권인 저축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개인 선물 투자를 계속 했습니다. (참고로 개인의 선물투자 자체는 범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2008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등 세계적 금융위기 때문에 터졌습니다. 최 회장이 담보로 내놨던 SK 주식 등이 금융위기로 '반토막' 나면서, 기존 대출들에 대규모 '담보부족 사태'가 찾아온 겁니다. 빚과 담보 부족에 시달리던 최 회장은 대규모 옵션 투자를 통해 빚을 털어내려고 했습니다.

최 회장은 2008년 10월 SK 텔레콤과 SK C&C 두 계열사에서 497억 원을 빼내 창업투자사인 베넥스 인베스트먼트 김준홍 대표를 거쳐 선물 옵션 투자금으로 썼고, 동생 최 부회장은 최 회장이 빼낸 돈을 채우기 위해 SK 가스 등 3개 계열사에서 495억 원을 빼내 돌려막기를 했습니다. 최 회장은 또 일부 임원들에게 성과급을 과다 지급한 뒤 이 돈을 돌려받아 만든 비자금 139억 원을 횡령한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최 회장 형제가 계열사 자금을 횡령하고 회사에 손해를 끼친 것만 2천억 원대에 달합니다.

SK 측은 "2008년 당시 최 회장은 SK C&C 비상장 주식 1조 원 어치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일부 매각하면 쉽게 497억 원 정도는 마련할 수 있는데 굳이 금융 당국에서 항상 감시 감독하는 펀드 자금에 손을 댔겠냐"고 항변합니다. 저는 경제부를 아직 출입해보지 못한 6년차 사회부 기자라서 잘은 모르겠습니다만, 상장 주식을 다 담보로 잡힌 상황에서 시장에 나오지도 않은 비상장 주식의 '미실현 이득'을 가지고 항변하는게 잘 납득이 안 됩니다. 

저는 우리 사회가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라면, 자본주의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 이른바 '화이트 칼라 범죄'에 더 엄격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로벌 기업을 표방하는 굵직한 대기업들의 경영진의 경제범죄, 특히 기업 오너와 관련해서 대부분 '집행유예→사면'의 순을 밟아왔지 않습니까.

최 회장이 회삿돈에 손을 댄 시점인 지난 2008년은, 최 회장이 1조5천억 원대의 분식회계 혐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가 특별사면을 받은 전후쯤입니다. 배경 설명 없이 A라는 사람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가 집행유예 기간에 같은 범죄를 다시 저질렀다면, 가중처벌을 하는 것이 우리 법의 원칙입니다. 

SK 측과 재계, 경제지를 중심으로 최태원 회장이 기소되면 재계 서열 3위의 SK 그룹이 무너질 것처럼, 검찰이 경제를 몰라서 국가 경제에 심대한 영향을 끼칠 결정을 했다는 의견을 쏟아냈습니다. 이 논리는 자본주의의 논리와도 맞지 않습니다. 주식회사는 오너 개인의 왕국이 아닙니다.

검찰은 할 만큼 해서 모든 물증을 이제 법원으로 넘겼습니다. 20세기 최대 경제범죄 사건인 미국의 '엔론사태' 때는 최고경영자에 대해 20년 이상의 중형이 나왔고, 이후 기업 CEO들의 범죄는 점점 더 엄하게 처벌하고 있는 것이 '글로벌 스탠다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지나치게 가혹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건강한 자본주의 사회라면, 기업 오너와 경영진들의 부도덕한 행위들을 더이상 "그동안 국가 경제 발전에 기여했고..." 등의 이유로 '집행유예→사면'의 순환이 계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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