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을 검색해보면 그의 이력은 ‘목사, 전 경찰공무원’이라고 나온다. 1938년생. 1979년에 조선일보사가 주는 청룡봉사상을, 1981년에 내무부장관 표창, 1986년에는 옥조근정훈장을 각각 받았다. 그 밖의 자잘한 상들과 특진은 일일이 언급하기도 어려울 정도다. 대단한 수상 이력이다. 현직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목사이고 취미는 독서, 특기는 합기도라고 한다.
네이버, 이근안 인물정보
그는 어제 타계한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보다 아홉 살이 많다. 하지만 지금도 정정하다.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근안. 그가 민주화 인사들을 고문한 사실이 드러나 1988년 수배가 되어 무려 10년 10개월을 숨어 지내다 1999년 10월 검찰에 자수해 징역 7년형을 복역한 사실은 인물 이력에서 빠져있다.
‘고문 기술자’로 널리 알려진 이근안은 지금은 이른바 ‘공안 목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지금 많은 언론은 이근안으로부터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평생을 그 후유증에 시달리다 2012년을 불과 하루 앞두고 세상을 떠난 김근태 상임고문의 삶을 조명하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그리고 김근태 상임고문의 타계를 계기로 그를 고문해 육신을 망가뜨렸던 이근안의 근황도 조금씩 다시 주목받고 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 문명 사회에서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고문을 자행한 사실이 입증된 몇 안 되는 인물인 이근안의 근황을 간단하게라도 정리해 놓는 것은 오로지 이런 사회적 망각에 대비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로부터 무슨 교훈을 얻어야 하는지를 잊지 않기 위해서...
'한겨레'는 31일 인터넷판에서 이근안의 근황에 대한 비교적 자세한 기사를 실었다. ‘공안 수사관’에서 ‘공안 목사’로 변신해 벌이고 있는 활동이 드러나 있다. 이 기사에 다르면 이근안은 2006년 교도소를 나와서 200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옥중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개혁 쪽 총회신학교 통신신학부 4년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한동안은 신앙 간증 위주의 목회 활동을 벌였는데 지난해부터는 각종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과거 자신의 행적을 정당화하기도 하고 ‘공안’ 활동까지 시작했다. (한겨레 해당 기사 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12781.html)
2006년 출소하는 이근안. 한겨레 기사에서.
당시에도 적지 않게 파문을 일으켰으나 곧 기억에서 사라졌던 1년 전의 국제외교안보포럼 강연도 소개되어 있다. 무상급식과 급식노조의 위험성을 강조하고는 "전교조가 학생들에게 북한을 찬양하는 교육을 하고 이를 간첩죄로 잡아들여도 재판과정에서 무죄로 풀려나더라", "7명의 경찰관이 불타죽은 부산 동의대 사태의 주역들이 민주화 인사로 지정돼 보상받는 것을 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무수히 많은 간첩들이 버젓하게 활동하고 있는데도 공안기능이 무너져 제대로 잡지 못한다", "대공분야, 간첩사건 수사는 속수무책의 지경"이라고 성토했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존재 의의를 '공안 전도'에서 찾는 모양이다.
이근안이 기독교에 귀의했다는 시기는 1998년. 고문 행위가 드러나 수배를 피해 어둡고 눅눅한 집 벽장에 숨어지낼 때였다고 한다. 요한 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라는 구절을 받아 적으며 자신도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고 한다. 한겨레는 이 기사에서 이근안에 대한 목사 안수 취소 청원 운동이 벌어진 적이 있다고 소개했다.
이근안의 근황에 대한 기사는 1979년 그에게 청룡봉사상을 줬던 조선일보 인터넷판에도 실렸다. 이 기사는 서두에서 "민청련 의장은 64세의 이른 나이에 숨졌고, 고문기술자는 목사가 돼 새로운 인생을 살고 있다"고 썼다. 더구나 이근안이 자신의 고문행위가 ‘애국 행위’였다고 주장했다며 구체적인 발언들을 소개했다. (조선일보 해당 기사 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2/30/2011123001298.html?news_HeadRel)
고 김근태 상임고문과 이근안_조선일보 기사
"임금이 바뀌면 충신이 역적 되고 역적이 충신 되는 수난의 역사 속에 두 시대를 사는 죄가 이렇게 무거운 것이냐", "훈장을 타서 매달 10만 원씩 받을 수 있는 돈도 안 받았다...내가 그 돈을 받기 위해서 애국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안중근 의사가 돈 받으려고 그랬나. 마찬가지다."
고문 기술자가 자신을 안중근 의사에 비유하는 상황이라면 도대체 안 의사는 지하에서 무슨 생각을 할까. 이근안은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고문 기술자가 아니고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신문(訊問) 기술자’가 맞을 것", "그런 의미에서 신문도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더욱 가증스러운 대목은 바로 다음이다.
"전기 고문을 한 건 사실이지만, 220볼트 전기를 쓴 게 아니고 면도기에 들어 있던 배터리를 썼다... 몇 시간 전부터 ‘너 전기로 지질 거다’라고 겁을 준 다음에 전기 잘 통하라고 소금물 뿌린 (김근태 상임고문의) 발가락에 배터리를 갖다 대고 겁을 주니 지하조직 일체를 자백했다", "내가 (김 상임고문을) 신문해서 단 몇 시간 만에 노동계와 학원에 침투한 조직을 캐내 전원 검거했다"고 자랑했다는 것이다.
이근안의 근황, 특히 그 중에서도 자신의 고문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넘어서서 ‘안중근 의사’와 ‘예술’ 운운하는 대목을 보면 이근안은 자신의 고문 행위를 반성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고문으로 육신이 망가진 피해자에 대해 이런 말을 버젓이 하는 사람에게서 우리가 반성의 어떤 단서를 읽어낼 수는 없다. 그는 스스로 ‘회개’와 ‘죄의 사함’을 거론했는데 ‘회개’의 두 요소, 즉 ‘뉘우침’과 ‘고침’이 애초에 없었으니 죄의 사함을 주장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정정히 살아있고, 앞으로도 자신의 고문을 미화할 가능성이 크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한 번 뉘우쳤더라도 슬그머니 입장을 바꾸는 경우는 정말 비일비재하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한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말만으로 그 사람이 정말 뉘우쳤다거나,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결국 그런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 사회가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사람은 용서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에 대한 분명한 인정을 요구하고 오히려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단호하게 받아주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이근안이 자신의 고문 행위를 애국적 행위로 떠벌리도록 판을 깔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용서는 잘못에 대한 인정과 뉘우침이 전제되어야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 이를 뛰어넘는 용서는 종교적 수준의 행위이다. 사회적, 정치적 의견과 진영의 차이를 넘어서서 과거의 반사회적이고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해서만큼은 분명한 인식을 공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민주화 운동의 큰 별 김근태 상임고문의 타계를 계기로 우리가 꼭 되새겨야 할 교훈이다. 정권 바뀐다고 고문 기술자가 애국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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