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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영국이 살아가는 법?

[취재파일] 영국이 살아가는 법?
영국이 27개 유럽연합 회원국 가운데 유일하게 유럽의 재정통합에 반대하면서 26개 나라들로부터 왕따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런던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출장의 목적은 2012년 신년 뉴스로 내보낼 런던 올림픽 준비 상황을 취재하는 것이었지만, 그 동안 유로존의 재정위기 전개와 해결방안 논의 과정을 지켜봐 온 입장에서 영국의 현재 상황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틈틈이 캐머런 총리의 재정통합 반대 결정에 대한 영국 사람들의 생각은 어떤지 알아봤습니다.

잠깐 동안의 제한된 취재로 영국의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언론이나 영국인들의 반응을 통해본 영국의 여론은 캐머런 총리의 결정을 불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26개 나머지 유럽연합 회원국들로부터 왕따가 될 것이라는 우려는 별로 보이지 않더군요. 오히려 캐머런 총리를 총리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았던 80년대의 대처 전 총리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공교롭게도 최근 들어 대처 전 총리에 대한 책이 앞다퉈 출간되고 여배우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맡아 대처 집권기를 그린 영화가 내년 1월 개봉 예정이기도 합니다.

1979년부터 11년 동안 집권한 대처는 민영화와 노조 해체의 대명사로 악명이 높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영국병이라 불리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저성장을 고치는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의 대처 열품은 대처리즘과 함께 유럽 통합에 반대하던 선견지명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습니다. 1990년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진행되던 유럽 통합에 반대하다 실각까지 하게 됐지만, 그 덕에 영국이 유로존 밖에 머물 수 있었고 지금의 유로존 위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당수의 영국인들은 당시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대처에 대해 향수를 느끼고 있고, 캐머런의 이미지를 대처와 중첩시키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캐머런이 이런 대처의 리더십을 물려받아 유로존 밖의 영국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나갈 수 있을 것인지는, 아직 진행중인 사안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하기에 이릅니다. 다만, 대학 등록금 인상이나 공공부문 임금 동결 같은 국내 정책뿐 아니라 유럽 재정통합 반대 같은 대외 정책에서 캐머런의 ‘대처 따라하기’는 지속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번에 영국을 들여다보면서 또 한 가지 느낀 점은, 겉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으면서도 내용적으로 확인되는 영국 사회의 진보성입니다. 영국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보수적이고 노쇠하다는 것인데요, 역사적으로 보면 영국사회는 그 어디 보다 진보적이었고, 그 어느 나라보다 젊은 리더십을 갖고 있습니다.

계몽주의가 태동되면서 일반 시민들의 권리 의식이 높아지고 왕정의 한계가 커지던 17세 후반, 시민 민주주의 혁명의 대명사인 명예혁명이 영국에서 처음 일어났습니다. 피를 흘리지 않고 왕정을 종식시킨 명예혁명이 1688년이니까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보다 100년 이상 앞서 조용히 시민 민주주의를 키워나갔던 것이죠.

유럽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퍼져나가던 19세기에는 칼 마르크스가 영국으로 망명해 저작활동을 하게 됩니다. 위험한 사상가로 분류되면서 고국인 독일(프로이센)과 초기의 활동 무대였던 프랑스에서 모두 추방됐지만, 영국은 마르크스를 받아들여 『자본론』을 낳게 한 것입니다.

영국은 또 최고 지도자인 총리의 자격에 대해 성별과 나이로 차별을 하지 않음으로써 독특한 리더십을 형성해왔습니다. ‘철의 여인’ 대처가 1979년 첫 여성 총리가 되기 전까지, 유럽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선거로 뽑힌 여성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대처 이후 영국 총리는 최연소 경쟁을 위한 자리인 듯한 상황입니다.

대처의 후임으로 1992년 총리가 된 존 메이저는 47살로 1964년 48살에 총리가 됐던 해롤드 윌슨에 이어 최연소 기록을 세웠는데, 5년 뒤 44살의 토니 블레어가 이 기록을 갈아치워 버립니다. 그리고 다시 2010년 43살의 데이비드 캐머런이 또 이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아직 총리는 아니지만, 2010년 친형제가 당권경쟁을 벌여 주목을 끌었던 야당 노동당은 40살의 에드 밀리반드를 당수로 뽑아 역시 최연소 기록을 만들었습니다.

능력이 있다면 남자든 여자든, 나이가 얼마나 되든 자신들의 지도자로 세우는 자세, 이것이 바로 노쇠하면서도 끊임없이 세계 무대에서 입지를 잃지 않는 영국의 저력 아닌가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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