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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구동성 "황당하고 답답합니다"

[취재파일] 이구동성 "황당하고 답답합니다"
대한축구협회가 사상 초유의 대형 사고(?)를 쳤다. 절차를 무시하고 덜컥 조광래 축구대표팀 감독을 해임한 것이다. 축구계는 혼란에 빠졌다. 조광래 감독을 좋아했던 사람도 싫어했던 사람도 모두 황당하다며 의아해한다. 대표팀 선수들까지도 이런 저런 채널을 통해 뭐 이런 일이 있나 하는 반응이다.

더구나 대안도 없이 저지른 것이다. 내년 2월 29일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이 걸린 운명의 쿠웨이트전은 하루 하루 다가오고 있다. 하겠다는 사람도 없고 할 만한 사람도 눈에 띄질 않는다. 그래도 축구협회는 어쨌든 조광래 체제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고 경질을 단행했다. 어떤 면에서? 경기력이? 아니면 다른 어떤?

대부분의 축구인들은 다른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분위기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공식 석상에서 협회 스폰서들의 압력도 있었다는 무책임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생각보다 큰 사고라는 것을 사고 친 이후에 감지한 축구협회는 느긋한 척(?) 하지만 고위층 인사들은 사실상 잠수를 탔고 실무자들만 대책 마련하랴 언론 상대하랴 죽을 맛이다. 모두가 황당하다. 특히 당사자가 된 몇몇 감독들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다.

# 날벼락 맞은 조광래 감독

12월 7일 저녁 8시. 조광래 감독은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11년 후배인 황보관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이었다. 급히 만난 자리에서 황보관 기술위원장으로부터 해임을 통보받았다. 그동안 지켜본 결과 지금의 대표팀 경기력으로는 월드컵 진출이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기술위원회는 없었지만 회장단의 뜻으로 결정했다며 다짜고짜 계급장을 떼어냈다.

"뭐라꼬...?"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던 조광래 감독은 하루아침에 축구협회와 담을 쌓게 됐다. 조광래 감독은 기자회견을 갖고 "황당하고 답답하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레바논전 패배를 포함해 부족한 면이 있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대표팀 사령탑이었는데 이 정도 사안이면 한 번쯤 논의라도 했어야 하지 않나, 한 번쯤 회장님이 전화로라도 귀띔을 해줘야 하지 않나, 이런 환경이라면 어느 누가 사명감을 갖고 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하겠는가, 축구 인생에서 가장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순간이라고 하소연했다.

너무 순식간에 황당한 일을 겪어서 일까? 조광래 감독은 일부에서 기대(?)했던 이른바 폭탄선언(?)은 하지 않았다. 축구협회의 수장인 조중연 회장과 경쟁관계인 허승표 전 축구연구소 이사장의 측근이라는 점이 전격 해임의 이유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말을 아꼈다. 현재 고향 진주에 머물고 있는 조감독은 "몰라. 앞으로 뭐 할지. 그냥 황당하고 답답하지 뭐." 전화기 너머 조광래 감독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 '봉동 이장님' 최강희 감독, "제발 좀 그만.."



K리그 전북을 우승으로 이끈 닥공(닥치고 공격)축구의 맹장이자 봉동 이장님이라는 친근한 별명의 소유자인 최강희 감독은 12월이 1년 중 유일한 휴식기이다. 그런데 올해는 쉴 틈이 없다. 전화기엔 불이 난다. 모두 대표팀 관련된 질문이다. "저는 능력이 안 됩니다." 이렇게 수도 없이 얘기했다.

그런데도 주변에선 얘기가 멈추질 않는다. 최강희 감독은 정말 하기 싫다는 진심을 말해도 오해를 살 수 있어 난처한 입장이다. 협회의 수장인 조중연 회장과 각별한 사이 때문이다. 최강희 감독이 선수 시절 현대에서 뛸 당시 감독이 조중연 축구협회장이었고 당시 조중연 감독은 성실한 수비수 최강희 선수에게 무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축구협회가 통 큰 사고(?)를 친 이후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이 다름 아닌 조중연 회장임은 모두가 아는 터인데 이런 상황에서 최강희 감독이 진심을 담아 "정말 하기 싫어요"를 반복한다면 자칫 곤경에 빠진 스승에 대한 반항(?)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인 듯 하다.

"소속팀 전북에 전념하겠습니다. 전북에서도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저는 단기간에 성적을 내는 스타일이 아니고 클럽팀처럼 장기간 합숙을 통해 팀을 만드는 스타일입니다. 등등.." 너무나도 합리적이고 정확한 이야기들을 변명(?)처럼 내놓아도 대표팀의 적임자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일부에서는 겸직이라는 황당한 얘기가 나왔다. 소속팀을 지휘하면서 위기에 빠진 한국 축구를 위해 우선 2월29일 쿠웨이트전 한 경기 만이라도 맡으라는 것이다.

느긋하게 쉬면서 내년 구상을 해야하는 닥공 감독에게 12월이 왜 이리 시련의 계절이 됐을까?? 도대체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인가? 정말 최강희 감독은 미칠 노릇. 도망가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답답합니다. 저는 진짜 용량 초과에요. 제발 하루 빨리 좋은 분이 맡으셨으면 좋겠어요." 전화기 너머 최강희 감독 목소리는 잔뜩 지쳐 있었다.

# '협회 출신' 김호곤 감독, "떠맡으라구요?"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직은 세계적으로 독이 든 성배로 유명하다. 그런데 이번 조광래 감독 전격 경질 이후로 대표팀 사령탑은 성배라기보다는 오로지 독배에 가까워졌다. 영광은 없고 부담만 가득한 자리가 된 것이다. 당연히 이력서를 내는 사람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지휘봉을 잡는 것은 '떠맡는다' 는 말이 딱 어울린다. 그렇다면 축구협회는 감독님을 모시기 보다는 희생양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김호곤 감독도 물망에 오르고 있다. 올시즌 울산 현대를 맡아 정규리그는 6위에 그쳤어도 플레이오프에서 강호 서울, 수원, 포항을 연파하며 당당히 챔피언전에 오르는 혁혁한 성과를 냈다. 단기전에 강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 저 사람이 연속으로 손을 내저으면서 김호곤 감독은 자연스럽게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는 느낌이다.

김호곤 감독은 큰 소리로 불쾌감과 거부를 표시할 입장만은 아니다. 소속팀인 울산 현대의 모기업이 축구협회의 정신적 리더인 정몽준 명예회장이 경영하는 현대중공업이다. 회장님의 한 마디면 내일 당장이라도 새로운 계급장을 달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 울산 감독으로 오기 이전에 축구협회 전무이사로 재직하며 행정을 총괄했던 좋은 이력(?)도 가지고 있다. 김호곤 감독의 축구 인생을 보면 어쩌면 가슴 깊은 곳에 한번쯤은 대표팀 감독을 꿈꿔왔을 수도 있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을 맡을 때 그리고 지난해 조광래 체제가 출범할 때 김호곤 감독은 매번 물망에 오르고도 낙점을 못받은 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모양새는 아니다. 더구나 겸직으로 원포인트 릴리프처럼 대표팀의 한 경기를 지휘하는 것은 본인에게 결코 플러스 요인이 아닐 것이라는 판단이다. 만에 하나 최종예선에 떨어지기라도 할 경우 모든 비난은 혼자 뒤집어 써야 할텐데 말이다. "이번에도 또 저요? 거 참. 제가 뭐라 그러겠어요? 좋은 분이 오셔야 할텐데." 전화기 너머 김호곤 감독의 목소리엔 묘한 애절함과 피곤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 뒤늦게 가동된 기술위원회, "어쩌죠?"



축구협회는 부랴 부랴 황보관 기술위원장과 함께 할 7명의 기술위원을 선임했다. 중차대한 시기에 수많은 눈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낯선 기술위원직을 수행하려니 모두 힘들 것이다. 그래도 한국 축구 발전이라는 위대한 사명감 속에 감독 선임에 힘을 보태려고 모였을 텐데, 보람있는 결과물이 탄생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선다.

2월29일 경기를 앞두고 감독 선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그런데. 시간이 많지 않다. 새로 맡은 기술위원들은 이제 자료를 뒤지고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첫 회의에서는 가급적 외국 감독을 뽑겠다고 발표했다. 국내 감독도 아니고 외국인 이면 신임 기술 위원들에겐 자료가 거의 없을 것이다. 급조된 기술위원들에겐 정말 쉽지 않은 작업일 것이다.

언젠가 발표될 새 감독 선임에 기술위원회가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을까? 혹시 기술위 회의실이 아니고 이번에도 조광래 감독을 해임했던 바로 그 밀실에서 바로 그 멤버들이 다시 모여 결정하는 것은 아닐까? 축구계에서는 이런 추측과 걱정을 하는 사람들이 아주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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