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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블랙프라이데이' VS '프리거니즘'

[취재파일] '블랙프라이데이' VS '프리거니즘'

자본주의에서 최대 미덕은 소비라고 했던가요? 이 미덕이 극단적으로 표출되는 때가 바로 '블랙프라이데이'입니다. 미국에서 최대 규모의 쇼핑이 이뤄진다고 하는 블랙프리아데이는 11월 마지막 목요일인 추수감사절 바로 다음날입니다. 전통적으로 연말 쇼핑 시즌을 알리는 시점이자 연중 최대의 쇼핑이 이뤄지는 날이다.

'검은 금요일'이라!...뭔가 무시무시한 느낌이 들지만 이 '검다'는 표현은 상점들이 이날 연중 처음으로 장부에 적자(red ink) 대신 흑자(black ink)를 기록한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한해 장사가 이날 매출에 따라 좌우된다고 할 만큼 엄청난 소비가 이뤄진다는 말입니다. 전국적으로 크리스마스 세일에 들어가는 공식적인 날이기도 해서 관련업계에선 이날 매출액으로 연말 매출 추이를 점치곤 합니다.

여기에 더해 미국발 금융위기로 미국이 장기 침체를 겪으면서 블랙프라이데이 매출 동향이 소비 심리와 향후 경기를 가늠하는 가늠자 역할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해 연말 뉴욕증시 연말 랠리의 향방도 여기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올해도 블랙프라이데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3억 미국인구의 절반이 이날 미국 전역의 백화점, 쇼핑센터, 할인매장, 또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최대 90%에 이르는 할인 상품 구매를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일주일 전부터 매장 앞에 텐트를 치고 앞 자리를 맡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였습니다. 대형 유통업체들이 할인폭이 큰 미끼상품을 내걸고 이른 새벽에 문을 열자마자 일년을 별러 온 쇼핑객들은 남보다 먼저 값싼 물건을 낚아채기 위해 치열한 아귀다툼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서로 밀고 밀치는 몸싸움은 기본이고, 과격한 방법을 동원하는 열혈 소비꾼들도 적지 않습니다. 떠밀려 바닥에 뒹구는가 하면 사람들의 발에 밟혀 다치기도 합니다. LA에서는 월마트매장에서 먼저 전자제품을 찜하려던 한 30대 여자 쇼핑객이 다른 쇼핑객들에게 최루가스를 뿌리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20여 명의 쇼핑객들은 물건 사러왔다가 병원 신세를 지고 말았습니다.

웨스트버지니아주 사우스찰스턴의 할인매장 '타깃'(Target)에서는 크리스마스 장식을 고르던 60대 남성이 갑자기 쓰려졌는데도 물건에 눈이 뒤집힌 쇼핑객들이 누구하나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결국 심장마비로 숨지는 불상사도 일어났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혼란한 틈을 탄 강도와 사회 불만세력들이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의 쇼핑몰에서 총기 사건과 폭발물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사실 올해뿐 아니라 매년 '블랙프라이데이' 이맘때면 한 차례 지나가는 한바탕 난리굿입니다.

                 


하지만 올해 '블랙프라이데이'에는 예년에 못 보던 광경이 하나 더 추가됐습니다. '1:99' 로 상징되는 극심한 빈부격차와 금융계와 자본가 세력의 해악을 꼬집으며 미국을 넘어 전 세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반 월가 시위대의 출연입니다. 시위대는 '블랙프라이데이'를 맞아 뉴욕 맨해튼의 유명 백화점인 메이시(Macy's) 앞에서 대기업을 규탄하는 항의 시위를 벌였습니다. 시위대는 "더 이상 대기업을 먹여 살리지 말고 노동자를 돕고 소규모 상점을 돕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워싱턴주 시애틀에서도 시위대들이 월마트 앞에 진을 쳤고 아이다호에서는 쇼핑몰에 '소비자 좀비'라고 이름지은 시위대가 투입돼 불필요한 물건 앞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수도 워싱턴DC에서는 시민들이 쇼핑 대신 필요 없는 물건을 다른 이들에게 무상으로 나눠주는 자선 시장이 열렸습니다.

이들은 '블랙프라이데이' 특수로 산업자본가들의 장부에는 검은 잉크가 새겨지겠지만, 수많은 소비자들의 가게부에는 대신 붉은색 잉크만 뒤덮히고 말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천박한 자본주의가 총 연출하고 유통업체들이 화려하게 꾸며놓은 무대위에서 어리석고 유혹에 약한 소비자들이 엑스트라로 대거 등장하는 '블랙코미디'가 바로 '블랙프라이데이'라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반 세계화, 반 물질주의, 반 소비적 성향이 극단적으로 나타난 것을 프리거니즘 (freeganism)이라고 합니다. 프리건은 '자유롭다(free)'와 '채식주의자(vegan)'의 합성어로, '거져 얻다(freegain)'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이들은 의식주 씀씀이를 최대로 줄이고 옷과 가구는 재활용, 물물교환으로, 잠은 주로 버려진 빌딩이나 변두리 값싼 공간을 임대해 해결합니다. 자본주의 경제에 최소한으로만 참여하자는 겁니다.

이런한 프리거니즘을 추종하는 캐나다 밴쿠버의 애드버스터스 미디어재단은 1992년 '블랙프라이데이'를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로 만들자고 공식 제안했습니다. 2008년 경제위기를 불러일으킨 자본논리에 대한 반성의 의미가 더해지면서 현재는 65개국에서 프리거니즘이 동조의 목소리를 얻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날'은 '아무것도 사지 않는 크리스마스'로 이어지고 심지어는 '1년 동안 쇼핑 안 하기' 프로젝트를 내놓으며 완전히 시장에서 발 끊기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먹다 남긴 것은 먹어도, 너희의 쓰레기 같은 제품은 사용하지 않겠다." 프리건들이 나눈 티셔츠에 새겨진 문구 입니다.

9·11 이후 미국 사회에 공포감이 만연하면서 모든 경제 활동이 위축되자 정치인들과 언론매체, 산업자본가들은 일제히 나서 '소비가 애국'임을 부르짖었습니다. 두려움에 떠는 미국 시민들이 소비하지 않을까봐 줄리아니 뉴욕 시장 같은 정치인들은 "걱정말고 식당에도 가고 쇼핑도 하라"면서 노골적으로 소비를 부추겼습니다. 소비는 되살아났고 공장은 열심히 돌아갔지만 불과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미국 경제는 금융부실 속에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소비가 경제의 동맥임은 두 말 할 나위가 없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무절제하고 과도한 과소비가 아니라는 전제하에서만 성립됩니다. 우리가 프리건이 될 필요는 없겠지만 지름신과의 힘 겨루기를 승리로 이끄는 현명한 소비자가 된다면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분명 의미있는 일임에 틀림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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