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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81세 투수의 아름다운 도전

[취재파일] 81세 투수의 아름다운 도전
국내 첫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트라이아웃(선수 공개 선발) 첫 날. 남다른 사연을 가진 도전자를 찾기 위해 홍보 담당자와 통화했을 때만 해도, 최고령 참가자는 38살일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야구 선수로서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깜짝 놀랄 나이도 아니죠. 현역에서 뛰고 있는 30대 후반 선수들이 적지 않으니까요.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취재를 갔습니다.

경기도 고양시에 자리잡은 국가대표 훈련장은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습니다. 일찌감치 도착한 지원자들이 인조잔디 위를 누비며 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왜소한 체격의 지원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구단 프런트도, 기자도 깜짝 놀랐습니다. 1931년생, 81살 장기원 할아버지가 몸을 풀고 계셨습니다. 구단에서는 지원서를 받긴 했지만, ‘설마 오시겠어’하고 있었답니다.



넘어지시거나 다치시면 어떡하나, 걱정스러운 마음 반, 기자로서의 호기심 반으로 장기원 할아버지에게 따라붙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모든 기자와 다른 참가자들의 시선도 당연히 할아버지를 향했습니다.

기우였습니다. 손자 뻘 선수들과 스트레칭을 하고 가볍게 달리는데, 전혀 뒤처지지 않았습니다. 유연한 데다 체력관리도 잘 해오신 티가 납니다. 불펜 피칭을 하는데, ‘퍽!’하고 공이 미트에 박히는 소리가 꽤 위력적입니다. 주무기는 슬라이더, 4년 전쯤 직구 구속이 120km까지 나왔다고 담담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쯤 되면 궁금해지죠. 할아버지, 대체 누구십니까!

할아버지의 81년 야구 인생은, 험난했던 20세기 우리 역사와 거의 같은 궤적을 그렸습니다. 일제 강점기 때 광주에서 나고 자라 어린 시절 야구에 대한 사랑을 키워왔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진 뒤 야구를 그만둬야 했습니다. 해방 후 고등학교에서 2년 동안 선수 생활을 했지만, 이번에는 한국전쟁 때문에 두 번째로 또 꿈을 접었습니다. 대신 6.25 참전용사가 됐습니다.

제대한 뒤에는 생업 때문에 바쁘셨다고 합니다. 의류제조업을 하다가, 1997년에야 비로소 ‘노노 야구단’이라는 실버 야구단에서 제3의 야구 인생을 시작하신 거죠. 리그에 참여하는 야구단은 아니지만, 팀의 에이스로서 매일매일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14년 동안 공을 뿌려오셨다는 얘기입니다.



‘고양 원더스’의 선수 모집에 연령 제한이 없다는 소식에 기쁜 마음으로 신청하셨다는  장기원 할아버지. 꽤 흡족하셨나 봅니다. "청년들을 따라갈 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힘있게 내가 따라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 더 붙이셨죠. "조금만 더 젊었으면, 공 스피드도 좋았을텐데"라고. 빙그레 미소 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흔 살만 넘어도 ‘노인’이라는 집단으로 묶어서 생각하죠. 본인에 대해서든,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든. 할아버지는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습니다. 누구보다 젊은 마음으로 야구를 즐기고,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맹활약중인 ‘노노 야구단’에서는 51살부터 81살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어르신들이 야구를 하고 계십니다. 상대적으로 ‘젊은’ 회원들이 최고령인 장기원 할아버지에게 “할아버지 덕분에 더 힘이 난다”고 늘 격려한다고 하죠. 멈출 줄 모르는 야구에 대한 사랑과 도전정신이 보는 사람들에게 힘을 주는 것이죠. 여든이 넘어서도 그토록 건강한 모습으로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계시니까요.

할아버지의 도전 정신을 잘 보여주는 인터뷰를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제가 어려서 했던 야구를 못했기 때문에 한이 된 거예요. 그래서 언젠가는 야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기회가 됐죠. ‘노노야구단’이 생겨서. 좀 더 나은 운동을 하고 싶어서 ‘고양 원더스’에서 트라이아웃을 한다고 해서 쫓아 나온 거예요. 용감하게, 도전하고 싶어서 나온 겁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건, 힘껏 한 번 도전해봐야 하는 거예요. 그러지 않고는 성공할 수가 없어요."

‘고양 원더스’ 수석 코치직을 제안 받았고, 이번 트라이아웃에는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김광수 전 두산 감독대행도 이 비범한 할아버지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김 전 감독대행 아버지보다 한 살이 더 많으신데도,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야구를 하는 모습에 놀란 거죠. 트라이아웃 첫 날 일정이 모두 끝난 뒤, 모든 참가자 앞에서 할아버지를 따뜻하게 격려했습니다.

"저희 아버지가 32년생이세요. 근데 31년생이시라고 해서 깜짝 놀랐어요. 대단하십니다. 건강하세요!"



야구 장비를 가득 담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20분 걷는 것쯤 문제없다며 지하철역까지 힘차게 걸어가는 장기원 할아버지. 꿈과 도전이 사람을 얼마나 건강하고 당당하게 만드는가를 제대로 보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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