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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참 나쁜 카드회사들

[취재파일] 참 나쁜 카드회사들

"전화 한 통화면 1시간 내에 500만 원까지 통장에 입금해 드립니다." 1999년 10월이었다. 삼성카드가 전화대출을 시작한 게. 당시 일하던 신문사 선배가 물었다. "아니, 어떻게 얼굴도 안 보고, 서류도 안 받고 대출을 해 줄 수가 있어?"

처음 넉 달 동안 삼성카드의 전화대출 실적은 6천억 원을 넘어섰다. 당시 LG캐피탈(LG카드의 전신)과 업계 선두를 타두던 삼성카드의 회심의 카드는 그렇게 성공을 거뒀다. LG캐피탈과 외환카드 등 경쟁업체들이 부랴부랴 뒤따른 건 당연했다.

그랬다. 정보통신 붐을 타고 확산된 카드론은 태생적으로 카드회사들의 과당경쟁의 산물이었다. 그리고 12년이 흘렀다. 그 카드론이 보이스피싱의 핵심 표적이 됐다.



올 1분기 9건에 1억 원. 2분기엔 39건, 4억 2천만 원의 피해가 신고됐다. 심상치 않았다. 금융감독원은 6월 10일 카드회사에 경고를 보낸다. 국제전화나 인터넷 전화번호로 카드론 신청이 들어오면 본인에게 재확인 하라고. 카드론 보이스피싱이 주로 중국에서 신청이 들어오기 때문이었다.

손쉬운 먹잇감을 확인한 일당들은 집요해졌고 더 용의주도해졌다. 3분기 470건에 45억 6천만 원의 피해가 신고됐다. 금감원은 10월 5일 카드회사에 2차 경고를 보낸다. 자동응답시스템(ARS)이나 인터넷으로 카드론을 취급할 때 본인 확인을 강화하라고. 가급적 직접 전화를 걸어 본인과 통화하거나 휴대전화로 인증번호를 부여하라는 얘기였다.

그리고는 10월 26일 이 내용을 언론에 발표한다. "11월부터는 본인 확인 절차가 강화돼 카드론 보이스피싱 피해가 최소화될 것"이라고. 비웃고 있었을 일당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11월 15일. 카드론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은 법원에 1차로 집단 소송을 제기한다. 금융감독원 앞에서 시위도 벌이고 진정서도 냈다. 억울하다는 것이다. 물론 보이스피싱 일당에게 감쪽같이 속아 개인의 금융정보를 알려준 것은 본인 책임. 하지만 상당수가 자신에게 카드론 한도가 부여돼 있는지도 몰랐다. 그 한도가 자신도 모르는 새 500만 원에서 800만 원으로, 또 1,200만 원으로 늘어나 있는지는 더더욱 알지 못했다. 카드회사가 대출을 승인하고, 입금하기 전에 전화 한 통화만 해 줬어도 피해는 훨씬 줄었다는 게 이들의 하소연이다.

11월 17일. 금융감독원은 다시 카드회사들에게 지도공문을 발송한다. '카드론 본인 확인 절차 강화 조치가 지체되고 있으니 조속한 시일 내에 조치를 완료하고 피해예방 노력을 강화할 것.' 이 때까지 카드회사의 60% 정도가 이런저런 이유로 본인 확인 절차를 강화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10월부터 11월 15일까지 카드론 보이스피싱 피해는 917건에 91억 8천만 원. 사태의 심각성이 인지된 6월 10일 금감원 첫 지도 때부터, 백 번 양보해서 10월 5일 2차 경고 직후 카드회사들이 팔을 걷고 나섰다면 이런 기하급수적인 피해 증가가 가능했을까? 10월 이후 카드회사들은 도대체 뭘 했단 말인가?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범죄를 돕는 행위, 아니 무위(無爲)였다. 그래서 참 나쁘다. 몇 천만 원을 날린 피해자들은 유산을 하기도 하고, 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하고, 가정 파탄을 겪기도 하고, 자살충동도 느낀다고 한다. 왜 안 그렇겠는가?



다음은 카드사별 피해금액. 신한카드 40억 5천만 원, 현대카드 28억 6천만 원, KB국민카드 28억 8천만 원, 롯데카드 18억 6천만 원, 삼성카드 13억 8천만 원, 하나SK카드 3억 7천만 원. 이 6개 전업 카드사가 전체 카드론 보이스피싱의 93%를 차지한다. 씨티은행, 외환은행, 우리은행, 농협 등 카드 겸영은행 피해액의 13배나 된다.

전업 카드사에서 보이스피싱 피해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이유는? 회원 수가 많아서? 개인정보 관리가 허술해서? 실적 우선주의가 마진 높은 카드론 장사에 집중하게 해서? 이 모든 요인이 복합 작용해서!

카드회사들은 피해자의 신고를 받으면 본인 채무임을 확인하는 증서에 서명을 종용한다. 서명을 해야 분할상환을 허용하든, 이자를 감면해 주든 '혜택'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게 소송이나 민원제기를 봉쇄하려는 꼼수임은 모두가 안다. 적극적인 피해자 구제는 커녕, 이런 식의 '시혜 운운'이라면 어줍지 않게 생색내는 사회공헌이나 기부는 집어치우는 게 낫다.

감독당국, 정부, 사회의 무신경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보이스피싱은 '흔한' 범죄로 치부되고, '피해자의 귀책 사유가 큰' 사건으로 인식되며, 피해구제나 방지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로 간주되고 있다. 론스타가 수조 원 챙겨가는 것보다 서민들 쌈짓돈 털어 수백억, 수천억 챙기는 중국의 보이스피싱에 더 분개하고, 더 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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