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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름다운 이별…나프탈렌과 곰팡이

제 첫 이별은 9살 때였습니다. 외동딸이었던 나에게 심심할 땐 가장 친한 친구로, 칭얼댈 땐 인자한 할아버지로 계시던 외할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순을 조금 넘기신 연세에 폐암으로 고생을 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2학년 겨울방학, 저는 할아버지랑 잠시도 떨어지기 싫어서 외할아버지가 머물고 계시던 외삼촌댁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하루는 옷가지를 가지러 잠시 집에 다녀오기로 하고 할아버지께 "나 금방 집에 갔다 올 테니까 할아버지 조금만 기다려~"하고 잠깐 할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죠. 마지막 눈을 감으시면서도 "란이야~"하면서 저를 애타게 찾으셨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사랑하던 할아버지를 마지막까지 지켜드리지 못한 죄송함, 더 이상 할아버지를 볼 수 없다는 슬픔에 9살짜리 꼬마였던 저는 울고 울고 또 울다가 쓰러지기까지 했습니다.

30살이 넘은 지금까지도 이별은 견디기 힘든 일 중 하나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추억 속에 묻혀가긴 하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순간들은 가슴을 콕콕 찌릅니다.

이별, 죽음, 노화, 소멸....... 단어만 들어도 왠지 모르게 눈물이 핑 돕니다. 무언가 사라진다는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될 수 있으면 이런 슬픔을 멀리 하고 싶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겪어야만 하는 일들입니다.

사라진다는 것, 멀어진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 중에 하나일 텐데요, 오히려 이런 슬픔 뒤에 숨어있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작가들이 있습니다. 어느 유행가 제목처럼 ‘아름다운 이별’을 보여주는 것이죠.

          

              Quartet-butterfly, Naphthalene, Ladder, Mixed media, 2011

일본 여성 작가 아이코 미야나가 의 작품입니다. 하얀 날개의 예쁜 나비입니다. 이 나비를 이루고 있는 하얀 결정은 다름 아닌 나프탈렌입니다. 좀이 생기는 걸 막기 위해 옷장 속에 넣는 그 나프탈렌 말입니다.

나프탈렌을 녹여 만든 작품을 투명한 상자 속에 넣었습니다. 아시겠지만, 나프탈렌은 시간이 지나면 공기 속으로 사라져 버립니다. 미야나가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결정들이 공기 중으로 날아가 버립니다. 결국 나비는 사라져 버리고, 투명한 상자 속에는 나프탈렌 결정들만 남게 되겠죠.

         


         Quartet-clock, Naphthalene, Mixed media, 22.4*30.5*19cm, 2011

미야나가의 나프탈렌 시계 작품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이 곧 과거가 되고 다가오는 시간을 맞이하듯이, 이 시계도 시간이 지나면 그냥 나프탈렌 결정으로 변하고 말겠죠. 한 때 소중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 없어져 버리는 것을 의미하겠죠.

하지만, 그들이 살았던 흔적은 그대로 결정으로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고 사랑스러운 존재는 떠나더라도, 그와 함께 했던 기억만은 온전한 형태는 아니더라도, 조각조각 남는다는 뜻일까요.

         

                        미셸 블라지, Landscape A, 2008 (오른쪽 작품)

프랑스 작가 미셸 블라지는 미술가이기도 하지만, 화학자이기도 합니다. 블라지의 작품은 추상화처럼 보이기도 하는데요, 놀랍게도 이 작품은 썩어가고 있는 종이입니다. 종이에 균을 배양해 균이 증식하면서 만들어내는 효과가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지고 있는 종이가, 종이를 없애고 있는 균들이,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작품 제목도 '경치'인가 봅니다.
 
            


             

                      박재환, 보이지 않는 건축물, ACE. mixed media, 2011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은 여기 또 있습니다. 샬레 속에 든 게 무엇으로 보이시나요? 학교 다닐 때 생물 시간에 본 듯한 장면이죠. 바로 곰팡이입니다. 커피를 마실 때 즐겨 먹는 에이스 크래커를 샬레에 넣고 그냥 놔뒀더니 이런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박재환 작가도 '곰팡이'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곰팡이 때문에 무언가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것이지만, 곰팡이 입장에서는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별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지금은 내 곁에서 사라져 과거가 되고 말지만, 또 다른 만남이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이별’ 그림 이야기를 하다 보니 쇼팽의 '이별의 곡'이 문득 생각나서 찾아 들었습니다. 실제로 쇼팽이 이별을 경험한 뒤 작곡한 곡이라고 알려져 있는데요, 잔잔하게 소곤대는 듯 한 선율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느낌입니다. 듣다 보니, 쇼팽도 이별 후에 누구보다 힘들었겠지만,  ‘슬픈 이별’만을 말하고 싶지는 않아 하는 것 같습니다. 슬픔이 지나가다 화도 나고 눈물도 나지만,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어 평화를 찾은 느낌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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