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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낮에 벽에 낙서하기

그래피티, 낙서인가? 예술인가?

토요일 오후 3시 서울 소격동. 일반적으로 삼청동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휴일에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 나들이에 나선 가족들, 서울 시내 관광을 하는 외국인들로 항상 붐비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 심상치 않은 차림을 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이들은 순식간에 일렬로 늘어서기 시작했는데, 그곳은 다름 아닌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사장 앞이었습니다. 이어 가방에서 장갑과 마스크를 꺼내 무장을 하듯 손과 입에 착용을 합니다. 그러더니 가방에서 스프레이를 잔뜩 꺼내들고 공사장 가림막에 뿌려댑니다.

어떤 사람은 미리 그려놓은 스케치를 보면서 그려나가고, 어떤 사람은 즉흥적으로 쓱쓱 스프레이를 뿌리면서 그림이나 글씨를 그려 나갑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 앞모습의 석고 조각을 가져와 가림막 위에 테이프로 붙이기도 합니다.

   

오늘 모인 사람들은 모두 25명. 모두 국내에서 활동 중인 그래피티 작가들로, 각자의 생김새만큼 개성 뚜렷한 서로 다른 25가지 작품들이 가림막을 채워 나갑니다.

오늘 작업은 1시간 안에 모두 끝났습니다. ‘치고 빠지는 작업’, 이른바 ‘플래시 몹’ 형태로 이뤄진 것입니다. 작가들은 실제로 페이스북을 통해 행사를 조직했습니다. 이런 행사를 해보자, 공고를 띄웠고, 뜻에 동참하는 작가들이 모여든 것입니다.

이렇게 갑작스레 모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건립을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면에는 “진정한 거리 예술이 무엇인지 보여주마”라는 속뜻도 숨겨져 있습니다.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은 공사를 진행하면서 가림막을 ‘아트펜스’, 예술 가림막으로 만들어 놨습니다. 공공미술로 유명한 이제석 광고연구소에 의뢰한 작품들로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모나리자, 고흐 같은 명화 속 인물들을 벌거벗은 모습으로 패러디해 가림막을 꾸몄습니다. ‘벌거벗은 미술관’, ‘모든 걸 다 보여주는 미술관’이라는 의미라는 것이죠. 국립현대미술관  답게 ‘경계 없는 현대미술’을 보여주자는 의미도 있었고요.

그래피티 작가들은 ‘비싼 돈을 들여 의뢰한 가림막’은 진정한 ‘거리 예술’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리 예술이란, 좀 더 자유롭고, 대가가 없더라도 작가의 개성과 열정이 듬뿍 담긴,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래피티 하면, 반항기가 가득한 내용에, 욕설과 신랄한 표현이 득실거리는, 낙서 같은 그림을 떠올리게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오늘 우연히 이곳에 들렀다 이 광경을 목격한 국립현대미술관 관계자는 “이거 혹시 반달리즘(문화?예술 작품 파괴 행위) 같은 것 아닌가”라며 걱정스런 눈빛으로 쳐다보더라고요. “지금 어떻게 할 수 없으니 그 위를 다시 칠하던지 해야겠다”며 후속 대책도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또, 작업이 진행된 지 30분 쯤 지났을 때에는 이곳을 관할 범위로 두고 있는 종로서 경찰까지 나왔습니다. 청와대와 가까운 이 동네에 혹시나 청와대를 ‘욕보이는’ 내용이 등장하지나 않을까 싶어 부리나케 달려 나온 것입니다.

사실 그래피티의 근원은 사회에 대한 불만 표현, 부조리한 것에 대한 풍자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그래피티 작가들은 남들 눈이 없는 밤에 2~30분 안에 작업을 후다닥 해치우기도 합니다. 사유 건물이나 재산에 그래피티를 그릴 경우, 개인 재산 손괴에 해당하기 때문에 추후 걸리지 않도록 낙관이나 서명 같은 태깅을 할 때에는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만큼은 남들 눈이 가장 많은 시간대에 나섰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래피티를 즐기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기존의 가림막 작품은 최대한 건드리지 않고 빈 공간을 활용해 작업을 했습니다. 실제로 기존에 만들어진 작품들과 의외로 잘 어울리기도 하더라고요.

반응은 뜨거웠습니다. 많은 시민들이 거의 처음 보는 광경에 걸음을 멈추고 한참동안 바라보기도 했고요. 이쪽저쪽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고 사진을 찍어 댔습니다. 심지어 주변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작가들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는데요, “왜 이런 걸 우리 동네에 해서 지저분하게 하느냐”고 혼을 낼 줄 알았는데, “우리집 앞은 비워두고 왜 여기만 하냐, 우리집 앞 벽에도 해달라”고 혼(?)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피티 작가들은 “2011년 11월 19일, 오늘이 파인아트(Fine Art, 순수미술)와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 거리예술)의 경계가 무너지는 날이 될 것”이라며 한껏 고무된 모습입니다.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에 묻혀 있지 않고 세상에 당당히 나오겠다는 것입니다.

‘예술’의 존재 의미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위로해주고, 편하게 해주는 것인 만큼, 그 형태와 방식은 예술인지 아닌지를 결정짓는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작가가 어떻게 작품을 만드는지 잘 모릅니다. 작가들도 자신의 작업 모습을 별로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고요. 남들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만 이뤄진다면,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함께 즐길 수 있는 ‘거리 예술’도 충분히 ‘예술’로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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