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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고바우 선생'의 특별한 편지

[취재파일] '고바우 선생'의 특별한 편지

봉투그림 속 한국미술 50년

권란 기자 harasho@sbs.co.kr

작성 2011.11.10 10:01 수정 2013.10.29 21:44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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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표 수집 한 번쯤은 다 해보셨죠? 저도 초등학생 때 모으던 우표 수집책 한 권을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우표 수집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그랬는지, 새 우표가 나올 때마다 교실 뒤편 공지사항에 내용과 가격을 붙여놨던 기억이 나네요.

최근에는 손 편지를 이메일이 대체한데다가, 전자 시스템이 발달하면서 우표 대신 바코드 스티커를 붙여서 그런지, 우표를 수집한다는 사람은 물론, 우표 자체도 자주 접할 수가 없습니다. 우표 얘기는 올해 초 발행된 뽀로로 우표가 뽀로로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한 달에 400만 장 이상이 팔렸다는 소식 정도가 전부였던 것 같네요.

보통 우표 수집은 어렸을 때 ‘반짝’인 경우가 많지만, 평생 우표만 모아온 분이 있습니다. '고바우 영감' 만화로 유명한 김성환 화백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김 화백이 모으는 우표는 조금 특별합니다.

김 화백은 새 우표가 발행되는 첫 날, 무조건 우체국으로 달려갑니다. 워낙 우표 수집광이라 우표잡지를 구독하면서 우표 발행 소식을 접했다고 하네요. 그렇게 새 우표를 사면, 바로 편지봉투에 붙여 우체국에서 그 날짜의 소인을 받습니다. 새 우표에, 그 날짜 우체국 소인이 찍힌 편지봉투를 '초일봉피'라고 합니다.

단지 '초일봉피'만 모아온 것은 아닙니다. 차곡차곡 모아둔 '초일봉피' 봉투에 우표와 관련된 그림을 그려 넣기 시작했습니다. 이걸 프랑스어로 '까세(cache)'라고 합니다.

김 화백은 이 두 개를 합친 '초일봉피 까세'를 지난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50년 넘게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아온 봉투 그림이 벌써 550여 장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그 봉투 그림은 다 누가 그린 걸까요?

물론 김 화백 자신이 고바우를 모델로 봉투에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새를 그린 동양화 우표를 붙인 봉투에 큰 새의 등에 타고 있는 고바우 영감을 그렸습니다. 만화 작가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한 폭의 동양화를 그린 듯한 느낌입니다.

다른 그림들은 김 화백과 친분이 있는 다른 작가들에게 부탁을 해서 받아 모았습니다. 작가진도 화려합니다. '바보 산수'의 운보 김기창, '물방울 작가' 김창열, '통영의 피카소' 전혁림, '여인 누드'의 김흥수, 생존 화가 중 작품 가격이 가장 높다는 '여인상'의 여류 화가 천경자, 아기자기한 그림이 돋보이는 황주리, 장욱진 등등....... 이렇게나 화려한 작가가 무려 160여 명이나 김성환 화백의 봉투 그림에 참여했습니다.

물론 모든 작가가 아주 흥쾌히 부탁을 들어준 건 아니었습니다. 김 화백의 말로는 부탁을 하면, "시무룩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편지 봉투 자체가 워낙 작고 종이 질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만큼 그림을 그리는 것이 더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자신의 작품으로 남을 수 있으니 막 그려줄 수도 없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 거장은 거장이었습니다. 그 작은 편지 봉투 위에 화가 자신의 특색을 살려 우표와 어우러진 그림을 남겼습니다.

천경자 작가는 우수에 가득 찬 눈빛의 여인을 꽃 우표와 어우러지게 그렸고,



운보 김기창 작가는 1970년 발행된 한국 명화 우표가 붙은 편지 봉투를 받았는데, 신윤복의 ‘취생원도’ 우표 옆에는 신윤복의 ‘미인도’의 미인과 닮은 여인을, 김홍도의 ‘적벽도’ 우표 옆에는 배 한 척을 띄웠습니다. 운보 선생은 이후 개인전을 열 때, 김성환 화백에게 다시 이 봉투 그림을 빌려가 전시를 했다고도 하네요.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은 역시 봉투 위에도 방금 막 떨어진 듯한 물방울을 그려 넣었습니다.

봉투 그림 작가는 단지 화가들만 포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김성환 화백과 친분이 있는 유명 인사들도 상당수 참여를 했는데요, 가장 눈에 띄는 건 이승만 대통령의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입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김 화백으로부터 건네받은 초일봉피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얼굴이 담긴 우표가 붙여져 있습니다. 여기에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런 그림을 담았습니다. 남편과 조국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이 담겨 있는 느낌입니다. 서명에도 남편의 성을 따서 '리프란체스카'라고 적었습니다.

한국 영화의 거장 임권택 감독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임 감독은 한국 고전 영화 우표가 붙은 봉투를 받았습니다. 썩 화려한 그림은 아니지만, 임 감독의 영화에 대한 열정이 잘 담겨 있는 그림입니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에게 그림을 부탁하면서, 혹시 대가는 얼마나 주었을까 궁금한데요, 돈으로 주고받고 한 경우는 없다고 합니다. 가끔 김성환 작가가 너무 고마운 마음에 자신의 원본 원고나 판화 작품 등을 선물하곤 했다고 합니다.

김성환 화백은 이 작품들을 꼼꼼히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PVC로 덮고 그 위에 다시 비닐 봉투로 잘 포장해서 스크랩북에 보관하고 있는데, 책 한 권당 40점씩, 모두 15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어느 작품 하나 소중하지 않은 건 없지만, 특히 꼼꼼히 그려진 유화 작품이나, 글씨가 들어간 작품이 더 마음이 간다고 합니다. 그 작은 공간에 그렇게 그리기 위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겠냐는 것입니다.

매일매일 들여다보는 건 아니지만, 마음이 울적하거나, 복잡한 일이 있을 때, 이 작품들을 찬찬히 보다 보면, 모든 근심 걱정이 싹 사라진다고 하네요. 그림을 그려 준 작가들과의 일화들이 생각나면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요.

김 화백은 이제 더 이상 우표도, 봉투 그림을 모으지 않는다고 합니다. 편지를 쓰는 일이 점점 드문 일이 되면서, 우표가 필요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고, 아는 화가들은 이미 세상을 떠났거나 연로하셔서 더 이상 그림을 부탁할 데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표를 모으고, 일일이 봉투에 붙여 소인을 받고, 그림을 의뢰하고, 다시 돌려받기까지 과정은 정말 '열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김성환 화백은 "어렵게 모은 만큼 더 소중하다"면서 수억 원 대의 대작보다 자신의 컬렉션이 훨씬 더 소중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보는 사람마다 '탐이 난다'고 말할 정도로 하나하나가 다 훌륭한 컬렉션이었습니다.

노 화백의 특별한 수집품 속에는 이렇게 한국 미술 50년사가 고스란히 녹아있게 됐는데요, 수집자 자신은 물론이고, 보는 사람들에게도 세월의 흔적과 추억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 고바우 김성환 소장품전 「다정한 편지」 : 롯데갤러리 본점, ~11월 24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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