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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빼빼로 데이' 숫자는 숫자일 뿐?

[취재파일] '빼빼로 데이' 숫자는 숫자일 뿐?

서울 을지로 4가 방산시장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빼빼로를 직접 만들고 포장할 수 있는 재료를 파는 가게들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원산지 이름조차 발음하기 어려운 각종 초콜릿 원료와 드럼채 만한 막대 과자까지 그야말로 '빼빼로 백화점'이 따로 없다. 연인의 영문 이니셜을 새길 수 있는 형틀은 기본이다. 여자친구가 직접 만들어주는 수제 빼빼로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 잘은 모르겠지만 11월 11일을 행복하게 보낼 남자들이 이렇게 많다니 부러움 반, 놀라움 반이었다.

이번 빼빼로 데이, 즉, 11월 11일은 1이 6개나 들어간 날이다. 한 제과업체가 이 날을 놓치면 천년을 기다려야하는 밀레니엄 빼빼로 데이라고 허풍을 떨었다가 뭇매를 맞고 있지만 백년만에 한번 돌아오는 날짜는 분명히 맞다. 이번 빼빼로 데이를 기념하겠다는 연인들이 유난히 많은 것도 이런 이유다. 천년만에 만난 사랑은 아니지만 백년에 한 번 있는 날을 함께 보내는 '백년의 사랑?', 뭐 이 정도 로맨스는 애교다.

아이를 낳아도 주민 번호 앞자리가 '111111'이니 특이한 날짜인 것은 틀림없다. 그래서 이 날 아이를 낳아 기념하겠다는 산모도 있을 정도다. 물론 일부러 분만을 유도하거나 제왕절개까지 할 생각은 없다. 그냥 날짜가 맞으면 괜히 기분 좋은 정도라는 얘기다.

사실 우연히 전자 시계를 봤는데 시간이 11시 11분이면 괜히 기분이 좋고 4시 44분이면 뭔가 찜찜한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있다. 포커를 즐기는 아저씨들은 에이스를 뜻하는 1이 4개나 있으니 판돈을 싹쓸이하는 짜릿함을 잠깐 느낄 수도 있다. 몸이 아픈 가족이 있는 사람은 4자가 여러개 겹쳐 괜히 우울해 질 수도 있다. 숫자의 특이한 조합은 각종 미신과 맞물려 사람의 기분을 좋게도, 나쁘게도 할 수 있다.

그러니 특이한 숫자 조합을 상술에 활용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인터넷 쇼핑몰에서 11월 11일 11시 11분에 결제하면 포인트 폭탄을 안겨준다며 고객을 끌어들이고, 은행 지점 개소식도 11시 11분에 한다며 큰 손들을 불러모은다. 그냥 기분 좋으라고 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1이 많아서 실제로 좋은 것은 별로 없다. 올해 11월 11일에 태어난 아이는 1이 6개 연속이라 어디 가서 주민 번호를 쓸 때 오히려 불편하다. "일일일일일일", 1을 여러번 쓰고 혹시 하나 빼먹고 썼는지, 더 넣었는지 다시 차분히 세어보는 일을 평생 반복해야한다. 눈이 나빠 난시라도 생기면 더 불편할지도 모른다. 또 이처럼 도용하기 쉬운 주민등록 번호도 없다.

중국에서는 8자가 부유함을 뜻한다며 좋아한다고 한다. 그래서 8자가 연속으로 누운 모양인 아우디 차량이 인기라는 속설도 있다. 8자가 연속된 번호판은 집한 채 값에 팔리기도 할 정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데 1995년 세계적 투자 은행이었던 베어링 은행을 파산으로 몰아넣은 로그 트레이더 닉 리슨이 만든 '깡통 계좌' 번호도 '8888888', 이렇게 8이 연속된 숫자였다. 돈을 많이 벌겠다며 8이 연속된 깡통 계좌를 만들고 불법 거래를 계속하다가 200년 역사의 은행을 날려먹은 거다. 역시 그냥 숫자는 숫자일 뿐이다.

하긴 2002년 대선에 나섰던 한 후보는 자동차 번호판을 2002로 달았다가 망신만 당하고  번호를 바꿨던 적도 있다. 차량 번호판을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경호하기도 힘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선거에서도 졌다. 역시 좋은 숫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마음 먹기에 달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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