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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학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이 충돌할 때

국위선양자 전형은 폐지된다지만...

[취재파일] 대학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이 충돌할 때

'입학사정관제'에 대한 글쓰기가 생각보다 늦어졌습니다. 그 사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연세대학교가 2014학년도 입시부터 입학사정관 전형에서 국위선양자 자녀와 손자녀를 지원 자격으로 하는 유형을 폐지하겠다는 입장을 국회에 밝혔습니다.

그 동안 8명의 학생들이 이 전형을 통해 연세대에 합격했고, 전직 대통령의 손자를 포함해 그들은 모두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은 이들의 손자녀들이었습니다. '국위선양'에 해당하는 훈장들은 고위 공직자, 성공한 기업가, 유명 문화계 인사 등이 주로 받아온 것으로, 입시 현장에서 '현대판 음서제'의 도구로 활용돼 왔던 셈입니다.

하지만 이 전형을 통해 특권층의 손자녀가 입학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정감사장에서도 논란이 되자, 대학 측에서도 부담을 느끼고 결국 폐지를 결정하기에 이른 겁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 글에서 예고한대로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 더 풀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하고자 했던 이야기는 연세대 국위선양자 전형이라는 특정 전형의 문제점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입학사정관제 전형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시나요? 올 초 교육 분야를 처음 맡고 교과부 취재를 시작하게 되면서 저는 입학사정관 전형의 유래에 대해 이전에는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입학사정관 전형이 국내 입시에 도입되기 전인 90년대 후반 대학을 다닌 저로서는 입학사정관 제도에 대한 지식이 단편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거든요. 교과부의 고위 관리와 입시전문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바에 따르면 입학사정관 전형을 시작한 미국의 명문대학들에는 다음과 같은 사정이 있었습니다.

1900년대 초까지 성적 즉 학업능력은 미국에서도 대학이 학생을 선발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미국 이민자들의 민족적, 문화적 배경이 다양해지면서 대학 입학생들의 구성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교육열이 높은 유태인들의 합격이 급증했던 것이죠.

기독교적 가치를 지닌 서유럽 출신 백인 혈통이 사회 지도층을 굳건하게 형성하고 있던 당시 미국 사회에서 유태계 학생들의 급증과 이로 인한 전통적 백인 상류층 학생들의 약세는 대학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은 현상이었습니다. 이 학생들은 아무리 공부를 잘 한다 해도 후에 미국 사회에서 주류가 되기는 어려울 테고 결과적으로 대학의 재정이나 위상에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졸업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명문대학들은 고심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 속에서 학생의 성적 외에 특기와 적성, 리더십 등 잠재력을 본다는 명분 아래 미국 명문대학들 사이에 '입학사정관 전형'이 처음 도입되게 되었습니다. 결국 대학들은 이 전형을 통해 정치, 사회, 경제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전통적 엘리트 계층과 동문들의 자녀를 더 많이 합격시킬 수 있었습니다. 대학이 어찌하기 어려운 '성적'이라는 기준 대신 다양하고 주관적인 평가 기준들을 통해 원하지 않는 학생들을 걸러내고 원하는 학생들을 선발할 수 있었던 셈입니다.

물론 입학사정관 전형이 도입된 미국 사회에 위와 같은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에서도 입학사정관 제도가 같은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을 거라 단언하기는 어렵습니다. 어찌됐든 '수능점수와 내신성적에서 드러나지 않는 개별 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겠다'는 입학사정관 전형의 명분은 우리 사회에서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획일화된 기준으로 서열이 매겨지고 오직 그 기준에 따라서만 대학진학 여부가 갈리는 현행 우리 입시 제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고조될수록 입학사정관 전형은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는 보완적 혹은 대안적 입시의 방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고 봅니다.

그럼 입학사정관 전형, 과연 우리 입시에서 현재 어떻게 활용되고 있을까요? 도입 명분에 맞는 목적을 얼마나 달성하고 있는 걸까요? 사교육업체 관계자들은 이 전형을 이른바 '스펙쌓기 경쟁'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스펙'을 쌓기 위해선 부모의 관심과 지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교과부와 대학들은 부인합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실제 소질과 능력 없이 스펙만 쌓아서는 이 전형을 통과할 수 없다, 심층 면접 등을 통해 스펙만 쌓은 학생들과 실제 잠재력이 있는 학생들을 구분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례별로 합격 이유와 사정이 다르다보니 무엇이 현실에 더 부합하는지 섣불리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유감스럽게도 적어도 학부모들 사이에서는 사교육업체들의 주장이 조금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게 현실인 것 같습니다.

또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최근 저는 모 대학 입학사정관 한 분의 호소를 전해 들었습니다. 입시철이 되자 이곳저곳에서 청탁 전화가 끊이질 않는다는 거죠. 인정 많고 부탁도 많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입학사정관에게 주변의 청탁이 끊이질 않는다는 건 어렵지 않게 이해가 됐습니다. 물론 이 분은 그런 민원에 영향을 받지 않겠다고 단언했고 이 분을 비롯한 많은 입학사정관 여러분의 양심과 양식을 큰 틀에서 믿고는 있지만, 이런 부탁이 넘쳐나는 현실 자체가 입학사정관 전형이 아직은 우리 사회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는 건 아닐까 우려스러운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결국 이 모든 문제에 답을 주어야 할, 줄 수 있는 주체는 대학과 교육 당국입니다. 대학들은 수험생들에 대한 정보제공 차원에서는 물론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한 일반의 불신을 불식시키기 위해서라도 보다 투명하게 학생 선발의 기준과 원칙을 제시하고 합격생들의 선발 이유에 대한 의미있는 정보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전형을 운영하는 과정에서도 보다 엄격한 책무성을 갖춰나가야 할 것입니다. 대학과 수험생들 사이의 신뢰 형성은 입학사정관 전형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의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세대의 국위선양자 전형 폐지 방침이 입학사정관 전형과 관련된 논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 현재의 입학사정관 제도는 이대로 괜찮은 것인지, 만약 아니라면 어떤 보완책이 필요한 것인지 논의하기 위해 보다 폭넓은 의견수렴의 장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대학 자율성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불리는 학생 선발권은 어느 수준까지 보장되어야 하는지, 대학의 '자율성'과 '사회적 책임'이란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할 경우 어느 정도 선에서 사회적 합의를 마련해야 하는지 함께 논의해 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언론에는 '스펙쌓기'와 무관하게, 내신이나 수능 성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하지만 특정 분야에 특별한 재능과 소질을 갖춘 학생이 입학사정관 전형을 통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는 사례가 때때로 소개됩니다. 그 제도의 유래가 어떠했든 잘 보완되고 제대로 운영된다면 입학사정관 전형은 획일적 선발 방식의 대안 혹은 보안책으로 충분히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입학사정관 제도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든 아니면 대안적 학생 선발의 유형으로 이 제도가 잘 정착되기를 바라는 사람이든, 현재의 입학사정관 전형에 대해 보다 꼼꼼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획일적 잣대로는 측정해낼 수 없었던 숨은 자질, 특별한 소질을 가진 학생들의 입학사정관 전형 성공 스토리가 일부의 '신화'가 아닌 많은 학생들의 '상식'으로 받아들여질 때까지 교육당국과 대학측이 보다 높은 수준의 사회적 책임 의식을 갖고 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구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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