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황우석 다시보기③-복제소 영롱이의 진실은?

[취재파일] 황우석 다시보기③-복제소 영롱이의 진실은?
복제 혁명의 물결

혁명은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하는 동안 영국 외딴 시골에서 생물학의 혁명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1996년 7월, 영국 월머트·캠벨 연구팀이 체세포를 이용한 양 복제에 성공했습니다. 연구팀은 가슴이 유달리 큰 미국 가수 돌리 파톤(Dolly Paton)의 이름 따 복제 양의 이름을 '돌리'라고 지었습니다.

'돌리'의 탄생에 과학계는 경악했습니다. 돌리가 태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체세포를 이용한 포유류 복제는 과학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는 게 정설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학설을 뒤집은 이 연구 성과는 왓슨과 크릭이 DNA 분자구조를 밝혀낸 업적에 버금가는 또 다른 생물학의 혁명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충격을 받은 건 일반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적어도 돌리가 태어나지 전까지 사람들은 똑같은 생명을 복제한다는 것은 공상과학소설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리’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도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왜 돌리의 탄생이 생물학의 혁명으로 평가 받았을까요? 당시 과학자들은 세포의 분화 정도가 복제 가능 여부를 결정하는 절대적 기준이라고 믿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수정란이나 초기 배아는 복제가 가능하지만 이미 분화가 시작됐거나 완료된 세포는 복제가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세포 분화가 완성된 ‘어른 세포’는 복제가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월머트 연구팀은 다 큰 양의 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에 성공한 것입니다.

               


월머트 연구팀은 어떻게 성체세포를 이용한 복제에 성공했을까요? 여기에는 세포가 어떻게 분화되고, 분화 과정이 어떻게 조절되는지(이른바 '세포주기')에 대한 발상의 전환과 새로운 통찰력이 주요했습니다. 월머트 연구팀도 이 연구의 핵심이 세포주기를 적절하게 조절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복제 연구를 하는 과정에서 이 세포주기를 조절하는 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였습니다. 오랜 연구 끝에 세포주기 연구를 담당했던 켐벨이 분화가 진행된 세포라도 세포주기를 G0나 G1에 맞추면 초기 상태로의 재프로그램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켐벨은 혈청의 배양액 농도를 크게 줄여 공여핵을 세포 분할 전 단계인 G0로 만들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세포를 굶겨서 분화하기 이전 상태로 되돌린 것입니다. 월머트 연구팀의 유일한 독창적인 연구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었습니다. 이는 세포주기를 적절히 맞추면 분화된 세포를 가지고 포유류의 복제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획기적인 연구 성과였습니다. 이 연구로 성체세포는 분화 능력을 잃어버려 재프로그램 될 수 없다는 기존의 정설은 한 번에 무너졌습니다. 확률이 너무 낮아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던 분화 세포의 복제를 실험이 가능한 수준으로까지 올려놓은 것입니다.

여기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하나 알려드리겠습니다. '돌리'의 탄생에는 한국인 정희태 교수(강원대 수의학부)의 연구가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정 교수는 강원대 축산학과에서 학부와 석사를 마치고 일본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3년 쓴 박사 논문에서 정 교수는 생쥐 수정란 복제를 위해선 세포주기를 G1 상태로 맞춰 재프로그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월머트 연구팀의 켐벨은 이 논문을 참고해 세포주기를 되돌리는 데 성공했고, 이 사실을 '돌리' 논문에서도 명백히 밝혔습니다.

과학자들은 왜 동물을 복제하려고 애를 쓸까요? 동물 복제연구는 여러 면에서 많은 이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문적으론 베일에 싸여 있는 발생의 신비를 밝히고, 세포가 작동하는 기전을 이해하고 유전자 조작의 세부 결과를 파악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산업적으로는 형질전환 동물 생산, 멸종 동물의 복제, 질병 모델 동물의 생산, 이종장기 개발 등에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넘어야 할 산도 많습니다. 복제 동물의 높은 치사율, 선천적 기형, 빠른 노화 등은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또, 이 기술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유전자 조작된 복제인간이 태어날 수 있어 이를 둘러싼 사회적·윤리적 문제도 간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런 점에서 '돌리'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과학사를 다시 썼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다음 복제 대상은 의심할 여지없이 인간이라는 우려가 같이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복제 연구에 대한 기대와 그것이 가지고 올 윤리적 논란도 같이 일어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언론을 통해 황우석 박사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복제 전문가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황 박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수정란 복제소를 탄생시킨 복제 연구의 선두주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당시 황우석과 월머트의 관심 주제는 달랐습니다. 월머트 연구팀이 알부민, 인슐린 같이 인간에게 유용한 희소물질에 관심이 많았다면, 황우석은 소, 돼지, 말 등 가축의 대량 증식과 개발에 연구 목표를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영국 월머트 연구팀이 다시 형질전환 복제양인 '폴리'를 탄생시켰습니다. 형질전환과 체세포 복제기술이 사용하면서 면역거부 반응울 극복할 가능성 생긴 것입니다. 이때부터 황우석도 체세포 복제기술이 지닌 가능성에 눈을 떴고, 본격적인 연구에 착수하게 됐습니다.

영롱하지 않은 영롱이(Young-Long)

               


'돌리'가 태어난 지 1년이 넘도록 새로운 복제동물은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아세포를 이용한 복제 연구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내고 있었지만, 성체세포를 이용한 복제 연구는 답보상태였습니다, 그러던 1998년 8월 모 언론에 우리나라에서 '돌리'처럼 체세포 복제기술을 이용한 송아지가 태어난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보도에 따르면 황우석 연구팀이 복제소 임신에 성공했고, 연구가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1999년 1월 복제소가 태어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1999년 2월 12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동물 '영롱이'가 태어났습니다. 언론은 포유류 복제에 성공한 황우석 연구팀을 칭송했고, 황 박사를 '대한민국 대표 과학자'라고 치켜세웠습니다. 외환위기로 시름에 잠겨있던 국민들도 큰 과학적 성과에 환호했습니다. 또 다른 신화가 입혀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생명과학계를 중심으로 '영롱이'의 탄생에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1월에 태어난다고 한 영롱이가 2월에 태어난 점, 체세포를 제공한 어미 소가 도축되고 없다는 사실, '영롱이'에 대한 연구논문이 한 편도 없다는 점 등을 그 근거로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 '영롱이'에 대한 논문이 없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한 논쟁거리였습니다.

흔히들 저희 기자들은 '기사'로 말한다고 애기합니다. 마찬가지로 학자들은 연구 성과를 '논문'이라는 형태로 발표합니다. 물론 요즘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언론에 먼저 연구사실을 발표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인 경우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연구 논문이 없다는 건 과학자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 점에 대해 황 박사는 2005년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당시 이미 외국의 다른 연구실에서도 동물복제에 대한 성과가 나와 있어 영롱이에 대한 연구논문을 발표를 해도 과학 저널에 실리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빼어난 연구 업적을 황 박사 스스로 부정한 발언이었습니다. 이를 근거로 PD수첩 제작진은 영롱이가 복제소라는 증거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럼, 진실은 무엇일까요? 딱 잘라 얘기하긴 어렵습니다. 다만, 당시 황우석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들을 보면 대략적인 정황을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영롱이가 태어난 1998년 황우석 연구팀에서 발표한 논문들 가운데는 성체세포 복제에 관한 논문은 없었습니다. 대부분이 성체세포 복제와는 거리가 있는 체외수정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최초로 성체세포 복제에 관련된 논문이 나온 건 그로부터 2년 뒤인 2000년이었습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이는 영롱이가 복제소가 아닌 체외수정으로 태어난 소일 수 있다는 추론을 가능하게 합니다. 일부에서는 당시 소의 유산을 일으키는 브루셀라병으로 진짜 복제소가 유산을 했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어느 경우든 '가짜 복제소 논란'이 일어난 건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황우석 연구팀이 성체세포 복제기술을 특허 출원한 1999년 7월의 자료를 보면 이때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연구 자료를 확보한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2000년부터는 성체세포에 관한 학위 논문이 계속 나왔습니다. 이런 결과로 미뤄 일부 학자들은 영롱이는 복제소가 아니고, 진짜 동물복제는 그 다음 해 쯤 성공했을 수 있다고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우리나라 최초의 복제동물과 그 연구자에 대해선 단정하기 힘들게 됐습니다. 어쩌면 '알 수 없다'고 과학사에 기록하는 게 가장 정확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영롱이' 관련 얘기를 마치기 전에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선, '영롱이'의 복제동물 진위를 떠나 황우석 연구팀은 정상급 수준의 동물복제 연구력을 갖췄다는 사실입니다. 복제 연구에는 핵 제거와 이식, 세포 융합, 배아 이식 등 다양한 과학기술이 필요한데, 황우석 연구팀이 등록한 특허를 보면 중요한 고비마다 독창적인 기술을 확보해 연구를 발전시켜온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핵을 안전하게 꺼내기 위해 고안된 이른바 '젓가락' 기술, 세포융합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최적의 전기자극의 횟수와 시간 등을 밝혀낸 것은 획기적이고 우수한 연구기술이었습니다. 그만큼 복제 연구에 관해서는 다른 연구팀들보다 앞서 있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습니다.

두 번째로 '영롱이'의 탄생은 황 박사에게 엄청난 선물들을 안겨줬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황 박사는 가축 번식과 복제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였지만,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영롱이'의 탄생 덕분으로 한 번에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습니다. 또,  BK21사업, 농림부, 삼성 그룹 등 각계로부터 많은 연구비를 받아 연구를 안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수의학은 물론 의학, 유전학, 축산학, 분자생물학, 간호학 등 다양한 분야를 전공한 우수한 인재들이 황우석 연구팀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이들 인재들은 황우석 연구팀의 가장 중요한 인적자산이 됐습니다. 이처럼 황 박사는 '영롱이'의 탄생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단번에 제치고, 본격적으로 연구 확장에 나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계속)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