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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또 야구계의 큰 별이…풍운아 최동원을 기리며

[취재파일] 또 야구계의 큰 별이…풍운아 최동원을 기리며

유치원을 들어갔을 때 쯤으로 기억합니다. 제가 응원하던 야구팀은 삼미 슈퍼스타즈. 포수 금광옥 선수 정도가 기억납니다.

어린 나이었지만 야구는 늘 제게 가슴 아픈 기억이었습니다. 제가 응원하던 팀은 늘 지기 일쑤였습니다. 어느새 징크스가 돼 버렸고, 6년 뒤 월드컵 축구에서도 제가 응원했던 우리 대표팀은 3전 3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지금도 우리팀의 승리를 간절히 바랄 때 경기를 보지 않는 버릇이 있습니다.

최동원은 어렸던 저에게도 간절했던 선수였습니다. 84년도 한국시리즈를 잊을 수 없습니다. 최동원이 던지면 롯데는 늘 승리했습니다. 삼미슈퍼스타즈에는 슈퍼스타는 있었지만 최동원은 왜 없을까 하는 허전함이 늘 남아 있었습니다. 당신은 확실히 특별한 존재였습니다.

특유의 와인드-업, 어찌보면 독특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그의 투구폼을 자주 흉내내기도 했습니다. 왜 여느 투수들은 최동원의 투구폼대로 던지지 못할까? 투구폼이 비슷하면 모든 투수들이 마구를 던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스포츠기자는 아닙니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최동원 선수의 와인드업은 사실 밸런스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동작으로 보입니다. 하체의 힘을 제대로 싣지도 못하고 공을 놓는 타이밍도 여간 잡기 힘든 투구폼입니다.

그러나 최동원은 달랐습니다. 타고난 유연성은 와인드업의 약점에도 불구하고 늘 강속구를 뿌려댔고 공은 100개 200개 할 것 없이 거침없이 뿌려댔습니다. 엇박 와인드업 때문에 타자들은 좀체 타이밍을 잡기 어려웠을 겁니다.

트레이드 파동이 있었지만 그래도 최동원의 강한 인상은 한국 프로야구사의 최동원-선동열이라는 투수 라이벌 구도로 자리잡았고 그의 활약은 프로야구 30년의 밑바탕이 됐습니다. 최동원은 진정한 레전드였습니다.

당신이 오늘 새벽 영원한 휴식을 떠났습니다. 지난 7월 말 경남고 유니폼을 입고 목동구장에서 벤치를 지켰던 수척한 당신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암이 재발한 것 아니냐는 일부의 우려에 당신은 다이어트를 급격하게 했기 때문이라며 투병생활을 애써 감추려 했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50일만에 당신은 53년 인생의 마지막 추석을 병상에서 맞이하며 하늘로 돌아갔습니다. 레전드의 마지막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했습니다. 오늘 새벽 야근을 하며 부랴부랴 최동원 선수의 별세를 알리는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10분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수많은 그의 활약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 거대하지만 짧은 건국의 역사 때문에 기껏 문화재라고 하는 게 베이브루스의 야구배트 정도가 고작이라고 비웃는 분들도 있습니다.

프로야구는 한국의 격동기에 국민들의 위로했던 스포츠입니다. 전두환 정권 시절 3S 정책의 일환으로 태어난, 축구와 함께 태동이 불운했던 스포츠였지만 어쨌든 국민들은 야구장에서 쌓였던 울분을 토로했던 삶의 커다란 위안이었습니다.

단순한 볼거리로 폄하하기엔 프로야구 30년사에 600만 관중 돌파는 예사롭지 않은 진기록입니다. 야구로 대한민국은 메이저리그를 위협했고, 세계 정상에 우뚝섰고, 한국 야구를 무시했던 일본 야구를 두들겼습니다.

한국야구사에 최동원은 그저 단순히 공 잘던지는 롯데 자이언츠의 운동선수가 아니었습니다. 한국 야구사를 이만큼 이끌어 오기까지 거대한 동력을 제공했던 야구계의 진정한 거인이었습니다. 해태 타이거즈에 종범신(神)이 있다면 롯데의 최동원은 부산의 별이었고 국보였습니다.

일주일 전 영원한 3할 타자, 또 하나의 레전드 장효조 선수와의 이별... 그리고 오늘, 야구에 청춘을 바치고 일생을 걸었던 또 다른 존경받는 야구인의 영원한 휴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한국야구사 30년... 찬란한 야구사에 찾아온 잇따른 비보에 야구를 사랑했던 한 명의 시민으로 안타까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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