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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재키는 정말 케네디를 사랑했을까?

[취재파일] 재키는 정말 케네디를 사랑했을까?

9.11테러가 일어난 지 10년이 됐습니다. 관련 취재를 하면서 미국인들에게 9.11이 어떤 의미를 갖는 날인지를 물어봤습니다. 그런데 전혀 다른 사람들이 똑같은 얘기를 해서 놀랐습니다. "9.11은 케네디 전 대통령이 암살되던 날 내가 어디 있는지를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처럼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케네디라는 인물이 미국인들의 가슴에 아직도 살아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늘 미국 언론들은 케네디 전 대통령의 부인 재클린 케네디가 1964년 백악관 안에서 전기작가와 인터뷰를 했던 내용을 담은 책이 모레(미국 시각 9월 14일 수요일) 출간된다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케네디에 대한 재키(재클린의 애칭)의 절절한 사랑 고백이었습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때 미국과 옛 소련이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간 적이 있다. 이 때 미국 정부의 많은 고위 공직자들은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멀리 피신시켰지만, 재키는 케네디 곁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다. 케네디가 토막잠을 잘 때면 같이 누웠고, 백악관 뜰을 말없이 거닐 때도 같이 걸었다. 핵폭탄이 떨어진다면 재키는 케네디와 같이 있기를 원했다.

"무슨 일이 생긴다면 저와 아이들은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백악관 안에 피신처가 없다고 하더라도... 저는 물론 아이들도 당신 없이 살 바에야 당신과 함께 죽기를 원해요."

그랬을 수 있습니다. 띠동갑으로 12살이나 어린 신부를 맞은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결혼한 1953년에는 연방 상원의원이었음) 신혼여행지에서 부모에게 보낸 엽서에서 이렇게 썼다고 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저를 그녀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만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일찌감치 미국 대통령이 되겠다는 포부를 갖고 있던, 그러나 상원의원이 되고 나서도 지붕 없는 컨버터블 차로 워싱턴 일대를 휩쓸고 다녔던, 일주일이 멀다하고 금발 미인들과 염문을 뿌렸던 매력적인 케네디 역시 재키와의 결혼을 결심한 데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분명히 있었다고 그의 일생을 추적한 사람들은 입을 모읍니다. 다만 그 사랑이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는 것 역시...

문제는 결혼 후에도 케네디의 엽색 행각이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잭과 재키를 아주 잘 아는 사람들은 나중에 이런 얘기들을 합니다. "잭(케네디 전 대통령의 애칭)은 파티 때 예쁘장한 여자에게 갑자기 사라져 버리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재키는 문득 자기 혼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곤 했습니다. 재키는 그런 수모를 감당할 마음의 준비가 돼있지 않았습니다. 결혼 후 1년쯤 지났을 때 재키는 마치 비행기 추락사고의 생존자처럼 오락가락 했습니다."

1956년 재키가 만삭일 때도 케네디는 친구들과 지중해로 요트 여행을 떠났고, 유산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계속 그 곳에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만에 하나 이혼하게 되면 대통령이 될 꿈은 포기해야 한다는 친구의 질타를 받고서야 마지못해 돌아왔다고도 합니다. 막내 동생인 에드워드 케네디 전 상원의원이 결혼하던 날에는 그의 귀에 "결혼한다는 게 절대로 부인 말고 다른 여자한테 한 눈 팔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고 얘기했던 게 녹음테이프에 담겼을 정도니....

백악관에 입성한 뒤에도 케네디의 바람기는 계속됐고 결국 재키는 애써 외면하는 방식을 택했다고 합니다. 케네디의 어머니가 남편의 불륜 사실을 부인하고, 남편과 싸우는 것을 피했던 것처럼. 재키는 자기가 백악관을 언제 비우는지, 또 언제 돌아오는지를 대통령 참모진들이 항상 알도록 신경을 썼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몰래 불러들인 여성들을 제 때 빼돌려 자기와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재키가 남편의 부정을 용서하고 용납했다는 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 생존법을 찾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라네요. 그런 재키의 속마음을 알려주는 두 가지 일화가 전해집니다.

1961년 캐나다를 방문했을 때  마지막 날 대통령 내외가 고별행사를 치르던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환송나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던 도중 재키가 한 여자를 보고는 돌아서서 대통령 보좌관들에게 프랑스말로 이렇게 얘기했다고 합니다. "당신들, 여자를 사서 내 남편한테 갖다 바쳤으면 된 거 아닌가요? 그것도 모자라 나보고 그 여자와 악수까지 나누라는 거예요, 지금..."

또 다른 일화는 파리에서 온 저널리스트 한 명을 백악관으로 초청해 안내했을 때 한 얘기입니다. 재키가 한 여비서 곁을 지나면서 그 저널리스트한테 불어로, "방금 그 여자가 내 남편하고 잠자리를 같이 하는 여자랍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성문제에 관해서 자유분방하다고 여겨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재키의 말을 들은 그 저널리스트는 백악관 보좌진들한테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도대체 여기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가요?"



그럼에도 재키는 잭의 든든한 정치적 동반자이기도 했습니다. 케네디는 TV 출연의 가장 큰 혜택을 입은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지요(1960년 대선때 닉슨 후보와의 텔레비젼 토론이 승리 요인 중 하나였다는 게 정설이죠).

백악관에 입성한 1년 뒤인 1962년 2월에 재키는 텔레비젼에 직접 출연해 백악관 내부를 공개하고 백악관의 역사에 대해서 미국인들에게 설명을 해줬습니다. 그 동영상은 지금 유투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요, 미국인들은 케네디를 통해 대통령의 하루를 시청한 데 이어 매력적인 영부인의 안내로 백악관까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열광했다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잭과 재키는 천생연분이라고 할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멀리 한국에서 자란 저조차도 그 둘에 대해서 이상하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로 잭과 재키는 미국 뿐 아니라 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에게 미국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단지 잘 살고 생활수준이 높으며 힘 센 나라였던 미국을 세련되고 문화적으로 손색이 없는 나라로 격상시켜 준 것이죠. 젊고 잘 생기며 능력있는 대통령, 그리고 유행의 최첨단을 걸으며 화사한 드레스를 즐겨 입는 30대 초반의 영부인, 그리고 그들의 사랑스러운 두 자녀는 백악관을 행복하고 신비로운 곳으로 탈바꿈 시켰고, 그들 스스로에게는 다른 대통령 가족이 보여주지 못한 황홀한 매력을 선사했습니다.

다만 지금보다 무려 50년 전의 백악관 안주인이다 보니 여성과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입니다. 이번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재키는 "여자는 모름지기 남편에 의해 규정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고 했답니다. 잭을 싫어했던 자유분방한 여성들을 싫어했고, 잭이 자신을 자랑스러워 한다는 점을 즐겼고(아마도 공개석상에 나서는 것을 의미하겠죠) 남편과 다른 정치적 생각을 가질 이유를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얘기를 덧붙였습니다. "잭은 남편이 리더고, 여자는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고 그걸 아내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면서 남편의 약점(여성 편력과 잭을 평생 동안 괴롭혔던 원인 모를 육체적 질병 -에디슨병이라고 진단되기는 했지만 정확한 병명은 아니라고... 어린 시절부터 잭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줬던 질병은 대단히 복합적인 고통을 잭에게 안겨줘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면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음)에 대해서는 전혀 거론하지 않고 남편을 아주 멋진 카멜롯의 기사로 묘사했습니다.

카스트로가 장악한 쿠바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승인한 피그만 침공작전이 실패하자 그 괴로움에 눈물 짓기도 한 인간적인 모습도 강조했습니다. 케네디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된 린드 존슨 부통령을 케네디가 몹시도 싫어했다는 사실도 공개했고, 대표적인 흑인 민권운동가로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명연설을 한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위선자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케네디라는 젊은 정치인을 만나 미국의 영부인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에 큰 회한이나 후회는 없었음을 보여주는 인터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인터뷰 시점도 1964년초로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된 지 얼마 안 지나서여서 더더욱 그랬던 것 같습니다.


특히 케네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미국인들에게 잊을 수 없는 잔인한 추억으로 남아 있지만, 재키에게는 여자로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남편의 잘못까지도 모두 용서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암살 이후 재키를 돌봤던 백악관 의료진 중 한 명에게 "잭과 잠자리를 함께 하면 기뻤다. 잭의 등에 난 흉터를 보면서 잭이 육신의 고통을 얼마나 잘 견뎌냈는지 알 수 있었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장례식이 끝난 며칠 뒤에는 시어도어  화이트라는 작가와 만나서는 케네디의 죽음은 전설 속 아더왕의 궁전이 있던 카멜롯의 최후를 상징한다는 표현을 썼다고 합니다.(카멜롯의 기사라는 이번 인터뷰에 공개됐던 내용과 대단히 유사한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알링턴 국립묘지 잭의 묘역에 1년 내내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을 만든 것도 재키의 아이디어였다고 하고, 잭처럼 암살당했으면서 미국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링컨 전 대통령의 장례 절차대로 해달라는 요구를 했던 것도 재키였다고 합니다. 케네디의 죽음 이후 재키는 비록 혼자이긴 하지만 다시금 잭과의 사랑을 완성하는 마무리를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케네디 없는 세상에서는 살고 싶지 않다던 재키는 케네디의 죽음 이후 5년을 혼자 살다가 세계 최고의 부자였던 선박왕 오나시스와 재혼합니다. 당시 미국인들이 미국 영부인의 자존심을 버리고 돈에 팔려갔다며 분노했다고 하는데요, 재혼도 8년만에 오나시스의 사망으로 끝이 납니다.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재키가 돌아왔을 때 미국인들은 그녀가 이제는 물려받은 유산으로 여유있게, 조용히 삶을 마무리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정작 그녀는 출판업자이자 패션업자로, 미국 사교계의 여왕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94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30대 초반의 영부인, 30대 중반의 미망인, 세계 최고 갑부의 부인, 그리고 돈 많은 미망인, 파란만장하고 극적인 재키의 삶을 돌아보며 미국인들은 "재키, 그녀는 누구보다 스스로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을 지키려 했던 용기있는 여성"이었다고 기억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국 역사에서 다시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매력을 갖고 있었던 케네디 전 대통령과 함께 재키를 추억하고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9월 12일은 1953년 9월 12일 잭과 재키가 결혼한 날이기도 하군요.

--- 이 취재파일은 이번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 미국 언론들의 기사와 함께 로버트 댈럭이 지은 두 권짜리 케네디 평전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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