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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기획취재팀의 애환: 꼬꾸라진 기획들-1

[취재파일] 기획취재팀의 애환: 꼬꾸라진 기획들-1

우리 SBS 기자들의 취재파일을 살펴보면 대부분 '성공적인' 취재 과정의 뒷이야기가 많은데요, 제가 일하는 기획취재팀은 고정 출입처를 갖고 있지 않고, 이른바 '맨땅에 헤딩'하는 부서라서 실패한 취재 사례가 훨씬 많습니다.

얼마 전 취재수첩에서 이런저런 실패 사례들을 훑어보다 보니 "일부 이야기들은 시청자 분들과 나눌 부분도 있겠다" 싶어 글을 써보기로 했습니다. 이른바 '꼬꾸라진 기획' 이야기죠. 앞으로 한 8편쯤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죠?^^ 자, 우선 1편을 올립니다.

지난 3월 기획했던 숙취해소 음료 이야기입니다. 대학 개강+봄 기업 인사철 등을 맞아 술자리가 늘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기획 취지는 이랬습니다. "숙취해소 음료를 많이 먹는데 과연 효과가 있긴 할까?" 굉장히 도전적인 주제였죠. 상대 음료회사가 있고, 과학적인 검증 방법도 모호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단 보도국 편집회의에서부터 논란이 일었습니다. "과학적인 검증이 가능하냐?",  "숙취해소 음료가 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오면 어떻게 하겠느냐?", "개인적으론 숙취해소 음료 효과를 보고 있다"

그래도 다행히 결론은 "한 번 취재해봐라"였습니다. 기초 실험 설계를 위해 일부 대학병원 의사들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리고 실험은 이렇게 만들어봤습니다.

'숙취'는 술과 관련이 높으니 숙취해소 음료가 혈중 알코올량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실험해보는 겁니다. 실험 참가자는 기자인 저와 일반인 2명, 즉 3명이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실험 종류는 세 가지였습니다.

1) 숙취해소 음료를 30분 전쯤 먼저 마시고, 이후 소주 1병(7잔반)을 5분 간격으로 한 잔씩 마신 뒤 마지막 잔 음주 10분 뒤 1차 혈중 알코올 양을 측정, 1시간 뒤 2차, 다시 2시간 뒤 3차 측정을 해보는 겁니다.

2) 두 번째는 소주 1병을 먼저 마십니다. 역시 5분 간격으로 한 잔씩 마시고 마지막 잔 20분 뒤 숙취해소 음료를 마십니다. 다시 10분 뒤 1차 혈중 알코올 량을 측정, 1시간 뒤 2차, 2시간 뒤 3차를 측정했습니다.

3) 마지막에는 숙취해소 음료를 마시지 않고, 소주만 1병 마시고, 역시 3차례 측정이 있었죠.


숙취해소 음료를 음주 전에 마시는 것이 좋은지, 음주 후에 마시는 것이 좋은지, 또 숙취해소 음료를 마신 것과 안 마신 것 사이에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었죠. 세 차례 실험 가운데 저와 다른 일반인 2명은 모두 다른 숙취해소 음료를 마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 오전 10시쯤 A병원에 모여 안주도 없이 소주 한 병을 마시는데... 아, 그 고통은 장난이 아니더군요. 5분마다 맑은 소주 한 잔을 들이키는데, 정말 목넘김이 끝내주더군요.

한번 실험하고, 하루 쉬고 또 실험... 일주일에 3번 아침 술을 마시니, '뭐 하나' 싶기도 하고....낮에 얼굴이 벌개서 사무실 들어오면 괜히 말이 많아지고...^^


하여튼 실험이 모두 끝난 뒤 아래와 같은 수치가 나왔습니다. 혈중알코올량의 단위는 mg/dL입니다.

 1) 세 명 가운데 A, B씨 두 명은 숙취해소 음료를 음주 전에 마신 것보다 '음주 뒤'에 마신 것이 혈중 알코올량이 더 떨어졌습니다.

 2) 몸무게가 많이 나가고 얼굴 혈색이 빨리 붉어지는 A씨가 혈중 알코올량이 가장 빨리 떨어졌습니다.

 3) 세 명 가운데 A, B씨 두 명은 숙취해소음료를 안 마시고, 술만 마셨을 때 오히려 혈중 알코올량이 더 많이 떨어졌습니다.

여기까지 실험을 끝마쳤지만, 결국 이 기획기사는 꼬꾸라졌습니다. 우선 실험 설계부터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도출된 정보도 과학적이지 못했습니다.

1. 숙취(매스꺼움과 두통 등)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물질은 혈중 알코올량보다는 알코올 분해과정에서 나오는 '아세트알데하이드(acetaldehyde)'라는 물질이었습니다. 저희도 실험 전 알고는 있었지만 아세트알데하이드 양을 측정하는 과학적인 방법과 장소를 찾는데 실패해 대안으로 혈중 알코올량을 선택했습니다.

혈중 알코올량도 그럴싸한 기준이긴 하지만, 역시 핵심 요소가 '아세트 알데하이드'라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2. 실험참가자가 3명에 불과한 것 자체가 작위적이었습니다. 과학적인 결과 도출보다는 실험을 했다는 정도를 시청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 더 컸습니다.

3. 실험참가자가 적으니 숙취해소음료 3개 제품의 개별적인 효과도 검증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모두 실패한 기획이었던 것이죠. 

얼마 뒤 다른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같은 내용의 방송을 했는데 실험 참가자 200명 상대로 아세트알데하이드 측정을 했더군요. 뭐... 많이 배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더군요...^^

실패한 기획이지만, 속쓰린 취재과정에서 나온 결과가 완전히 의미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개인적인 추정을 전제로 말씀을 드리면...

 우선 저와 B씨처럼 키와 몸이 작은 분들은 혈중 알코올 분해능력이 적은 듯합니다. 반대로 A씨처럼 덩치가 크신 분들은 알코올 분해를 잘 하는 것 같고요.

 실제로 알코올 분해능력은 간에 있는 알코올 분해 효소 '알코올 디하이드로나아제(alcohol dehydrogenase)'를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는데요, 이 효소는 사람의 몸 크기와도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실험에 참가했던 A씨는 술 마실 때 얼굴이 쉽게 붉어지기도 하셨는데요, 과학적으로는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알코올 분해 능력보다 알코올 알레르기 반응에 불과하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하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숙취해소 음료의 효과... 100% 있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실제 식약청은 숙취해소음료를 건강기능식품이 아니라 일반음료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숙취해소음료 업체들이 숙취해소기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해 제출했다면 절차를 거쳐 건강기능식품으로 인정을 받았겠죠?

 지금도 소주병을 보면 실험 생각이 납니다. 안주 없이 소주 한 병을 35분 만에 다 들이켰으니... 어쩌면 실험을 제가 즐겼을지도...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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