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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포기 않으면 기적이 되고, 기적은 감동을 만든다

[취재파일] 포기 않으면 기적이 되고, 기적은 감동을 만든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습니다. 서서히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고 정리할 때가 다가오는 거죠. 올 한 해 이런 저런 기사를 보면서 단순히 기사 가치로서가 아니라 감동으로 다가왔던 순간들을 정리해 보고 싶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기적을 만들고, 기적은 감동을 준다는 당연하고도 단순한 진리를 느꼈던 적이 유난히 많았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은 7월 7일 멀리 남아공입니다. 평창이 3번의 도전 끝에 마침내 동계올림픽 개최에 성공했습니다. 그것도 1차 투표에서 총 95표 가운데 무려 63표를 확보해 독일의 뮌헨(25표), 프랑스의 안시(7표)를 압도적으로 제쳤습니다. 현지에 있던 유치위 인사들 뿐 아니라 대한민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와 "평창"이라는 함성과 구호가 터져나왔죠. 당시 이런 저런 기사들 가운데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자크 로게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의 인터뷰였습니다.

"솔직히 저는 이번 개최지 결정이 1차 투표에서 끝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2차 투표까지는 갈 걸로 봤습니다. 그러나 잘됐습니다. 될 만한 곳이 됐습니다. 평창의 오늘 승리가 주는 교훈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인내와 끈기는 반드시 이긴다는 것이죠. 결코 포기하지 않는 평창의 정신이 보답을 받았습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면서도 한국 사람들의 마음과 끈기를 정확하게 꿰뚫는 멋진 인터뷰였습니다. 저는 자크 로게 위원장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평창이 발표되던 순간 이상의 감동을 받았습니다. 승리 직전까지 갔다가 뱅쿠버에게 역전패 당했던 2003년, 기대는 가득했지만 허망하게 소치에게 지고 만 2007년, 그 때 더 이상 안 될 것 같다며 포기했다면 평창의 감동적인 승리는 없었겠죠.

그로부터 불과 사흘 뒤 독일 드레스덴에서도 또 한 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여자 월드컵 대회에서 미국이 만들어냈죠. 8강전에서 브라질과 맞붙은 미국팀은 1대0으로 앞서가다 한 골을 내주고 결국 연장전까지 치르게 됐는데 연장 전반이 시작되자마자 한 골을 또 내줘 패배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연장 후반도 다 끝나고 주심이 시계를 들여다 볼 즈음 정말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시간에 쫓겨 무조건 상대 골문 앞으로 차넣은 볼에 미국의 애비 웜바크가 정확하게 머리를 대서 동점을 만들어낸 것이죠. 미국 벤치 마저도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에 소리 지르기 바빴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사실상 승부는 그 걸로 끝이었죠. 브라질 선수들은 이미 패배한 것 같은 표정들이었고, 미국 선수들은 우승한 팀 같았습니다. 승부차기도 5대 3 미국의 승리였습니다.

당시 미국 신문의 기사 중 한 토막입니다. "희망은 없었다. 가능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 것도 한 명이 퇴장당해 10명이 뛰는 미국 축구팀이 11명이 다 뛰는 브라질을 상대로 이긴다는 사실이. 그러나 7월 10일은 분명 미국 여자 축구의 날이었다."

골을 넣은 웜버크의 말입니다. "저도 믿기지 않아요.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미국에게는 완벽한 날입니다. 그리고 미국 여자 축구대표팀에게는 역사가 된 날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미국팀의 기적은 일주일 뒤에 일본팀이 만들어낸 같으면서도 또 다른 기적에 자리를 내줍니다. 7월 18일 여자월드컵 결승에서 미국과 일본이 맞붙었습니다. 일본은 과거 24차례 미국과 붙어서 단 한 차례도 이겨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승리는 미국의 차지라는 예상이 압도적이었죠.

실제 경기내용도 미국의 우세였습니다. 미국의 선제골, 그리고 일본이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으로 이어졌는데, 역시 연장 전반에 8강 기적같은 승리의 주역이었던 애비 웜바크가 또 다시 헤딩골을 넣어서 2대 1로 미국이 앞서갔습니다.

그런데 패색이 짙던 일본팀이 연장 후반 12분에 사와 호마레가 발로 방향만 살짝 바꾸는 감각적인 슛으로 극적으로 동점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리고 승부차기에서 3대 1로 일본이 이겼습니다. 극적이라는 말로 모자란 정말 대단한 승리였고 우승이었습니다. 일본 여자 축구대표팀은 FIFA가 주관하는 성인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승에 오른 첫 아시아 국가대표팀이 됐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비슷한 형태의 기적은 마찬가지로 결코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만들어냈습니다. 연장후반 동점골을 넣은 사와 호마레 선수는 "믿을 수 없습니다. 최후까지 포기하지 않고 싸운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까지 달렸고 모든 힘을 다했습니다. 세계 1위를 목표로 싸워 승리한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8강전 미국 승리의 주역이었던 웸버크 선수의 인터뷰 내용과 거의 똑같죠. 결국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기적을 만들어냈고, 그 기적은 대지진으로 좌절해 있던 일본 국민에게 커다란 희망과 감동을 줬습니다. 노회한 FIFA의 제프 블래터 회장은 "FIFA에서 일한 36년동안 이 이상의 충격은 없었습니다"며 일본의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미국 역사상 가장 더웠다는 지난 여름 워싱턴DC에서는 또 하나의 기적이 미국 전역을 감동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지난 1월 애리조나주 총격사건 때 머리에 총상을 입었던 가브리엘 기퍼즈 미 연방 하원의원이 주인공이었습니다.

8월 1일 미국 의회에서는 연방정부의 부채 상한선을 증액하는 합의안에 대한 표결이 있었습니다. 미국이 사상 최초로 채무 상환 불이행, 즉 국가가 부도를 맞는 사태를 맞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미국 민주당은 백방으로 표 단속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총상 이후 힘겨운 투병 생활을 계속하고 있는 기퍼즈 의원이 참석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 못했습니다.

표결 상황을 생방송으로 전하던 미국 방송사들이 갑자기 회의장 한 곳에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곳에는 짧게 커트한 머리의 여성이 서 있었고 미국 의원들이 그녀를 중심으로 서서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카메라가 줌인해서 그녀의 얼굴을 잡았을 때 미국 방송사 앵커들은 탄식처럼 이런 말을 내뱉었습니다. "오, 이런. 기퍼즈 의원입니다. 그녀가 오늘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기퍼즈 의원의 육성이 방송을 통해 나오지는 않았지만 화면 속의 그녀는 "땡큐"를 연발하면서 환한 표정이었습니다. 완벽하게 회복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그녀의 출현은 동료 의원들은 물론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미국인들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인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은 "초당적인 투표가 필요한 순간 기퍼즈 의원이 투표에 참여한 것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민주당은 결코 그녀에게 본회의에 참석하라고 권유하지 않았습니다. 기퍼즈 의원이 스스로 판단해 참석한 것입니다."

기퍼즈 의원도 본회의 표결이 끝난 뒤 개인 명의의 성명을 발표해서 "내가 참여하지 않아 미국 경제가 무너질 수 있는 상황이 생기게 할 수는 없었다"면서 미국민을 위한 초당파적 협력이 당내 정치보다도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성명은 지나치게 정치인다운 내용이었고, 실제로 그녀가 작성했다고 보기에도 못미더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보다는 모두가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극한 상황에서도 삶의 끈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정신력으로 죽음을 이겨낸 그녀의 불굴의 투쟁 그 자체가 주는 감동이 더 컸다고 보여집니다. 기퍼즈 의원도, 그녀의 우주비행사 남편도, 의료진도 결코 자신을, 아내를, 환자를 포기하지 않았고 그리고 이겨냈습니다.

포기하지 않는다고 모두가 기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이 기적의 필요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받는 감동은 이 세상을 살만하다고, 그래서 나 역시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게 만드는 충분조건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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