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취재파일] 운전이 뭐기에…사우디 여성들의 전쟁

[취재파일] 운전이 뭐기에…사우디 여성들의 전쟁

탈레반 치하의 아프간 정도를 빼면 21세기 지구상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여성 억압적인 나라가 바로 사우디 아라비아일 것입니다. 이른바 와하비즘이라 불리는 이슬람 복고주의에 입각해 타락의 여지를 원천 봉쇄하는 지극히 엄격하고 청교도적인 삶이 강요되고 있습니다.

여성의 얼굴 가리개인 니캅 착용시 눈 부위마저 망사로 가리게 하고 가족이 아닌 남녀는 나이와 상관없이 한 공간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성의 운전이 금지돼 있습니다.

여성이 운전을 하게 되면 외간 남자와 맞닥뜨리게 돼 자칫 비도덕적인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러다 보니 대중 교통이 열악한 사우디에서는 여성들이 경제적 여건이 어려워도 남성 운전 기사를 고용해야 하거나 볼 일이 있을 때마다 일일이 남자 가족, 친척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이러다보니 엉뚱한 곳에서 일이 터져, 자신이 고용한 남자 운전기사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일까지 이따끔 발생하기도 합니다.

견디다 못한 여성들의 반발과 투쟁은 20년 전부터 시작됐습니다. 40여 명의 여성이 수도 리야드에서 운전 시위를 벌였지만 모두 체포돼 직장 박탈과 여행 금지라는 가혹한 처벌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후에도 소수 용감한 여성들의 운전 시위가 이어졌고 지난 2007년에는 수천 명이 서명 운동까지 벌였지만 왕실과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상조라는 말만 되풀이하며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던 차에 최근 이 지역에 불어닥친 민주화 열풍에 힘입은 사우디 여성들이 다시 행동에 나섰습니다.

지난 달 21일 알-셰리프라는 32세 여성이 자신이 운전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체포됐습니다. 이 여성은 몇시간 만에 풀려났지만 다음날 다시 운전 시위에 나서 또 연행됐습니다. 이어 지난 9일에는 2~30대 여성 6명이 운전을 하다 경찰에 체포됐습니다.

여성 운전자들의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3천여 명이 석방을 촉구하는 탄원서에 서명했고 일이 커질 것을 염려한 사우디 정부는 이들을 조기에 풀어줬습니다. 하지만 자유의 몸이 된 알-셰리프는 이번엔 페이스북과 트위터를 통해 6월 17일 여성 운전자들이 일제히 차를 몰고 거리로 나와 대규모 시위를 벌이자는 대담한 제안을 내놓았고, 이에 1만 2천 명이 지지를 표시한 상태입니다.

사우디 여성단체는 또 클린턴 미 국무장관에게 여성 운전 금지제가 철폐될 수 있도록 지지해 달라는 편지를 보내는 등 이번 기회에 이 문제를 국제적인 이슈로 만들어 운전권을 쟁취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사우디 정부의 입장은 상당히 곤혹스러울 듯 합니다. 가뜩이나 민주화 열풍이 올해 초에 이어 다시 사우디에 불어닥칠까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운전권을 둘러싼 여성들의 적극적인 행보를 강경 진압하자니 후폭풍이 우려되고, 그렇다고 내버려 두거나 운전권을 부여하면 또 다른 분야의 개혁 요구가 거세게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입니다.

다시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지, 아니면 제반 개혁의 시발점이 될지, 얼마나 많은 사우디 여성들이 17일 용기를 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많이 본 뉴스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댓글

    방금 달린 댓글
    댓글 작성
    첫 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0 / 300

    댓글 ∙ 답글 수 0
    • 최신순
    • 공감순
    • 비공감순
    매너봇 이미지
    매너봇이 작동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