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푸른 눈의 국악원로 해의만②

"젊은이들이 국악을 안 좋아해서 안타까워요"

김수현 기자 shkim@sbs.co.kr

작성 2011.06.10 11:46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푸른 눈의 국악원로 해의만②

* 푸른 눈의 국악 원로 해의만①에 이어지는 취재파일입니다*

해의만 선생은 한국전 참전용사다. 1953년 그는 강원도 지역의 야전병원에서 위생병으로 근무했다 한다. 그 때 국악을 처음 만났다. ‘빨치산의 교란 작전’ 때문에.

“병원 앞에 큰 산이 있었는데 새벽 2, 3시에 빨치산들이 북하고 태평소하고 징, 꽹과리를 아주 큰 소리로 연주했어요. 왜 그렇게 했냐면 그렇게 하면 우리는 잠을 못 잤으니까. 그런데 저는 특히 태평소 소리가 너무 재미있고 상쾌한 느낌이 드는 거예요. 다른 군인들은 그 소리 굉장히 듣기 싫어서 잠을 못 잤는데 말이죠.”



선생은 1954년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그 소리를 잊지 못했다. 당시 그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는데, 마침 한국 유학생을 한 명 알게 되어, 한국에는 다양한 전통 악기가 있고, 다양한 장르의 국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 유학생은 한국에 돌아와 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선생과는 지금도 교류하고 있다 한다. 전날 팔순 잔치에도 왔었다고.)

선생은 한국의 전통 음악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러나 민간인은 한국 입국이 어려운 시기였다. 결국 그는 1960년이 돼서야 한국 땅을 다시 밟을 수 있었다.

“그 때 인사동 옆에 한국 국악예술학교가 있었어요, 조그맣게. 제가 교장선생님 찾아가서 ‘한국 전통음악 배우고 싶은데, 여기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시면 제가 영어를 가르치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어요.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이 ‘우리 학교는 너무 작고 돈도 없어서 월급을 못 드리는데, 대신 악기하고 소리하고 여러 가지를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셨어요.”

해의만 선생은 국악예술학교에서 국악을 공부하면서 영어와 오선보 사용법 등을 가르쳤다. 그는 1963년 뉴욕 아시아학회에서 한국 전통음악에 대해 발표했고, 1964년 우리 전통예술 공연단의 미국 공연을 성사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 필하모닉 홀 공연에 이어 미국 각지의 대학과 대학원을 순회하면서 우리 전통음악을 미국에 소개했다.

영국의 음악학자 존 레비가 입국해 한국 음악 컬렉션을 녹음한 것도 그가 주선한 것이라 한다. 존 레비는 1964년 한국에 50일간 머무르면서 우리 전통 음악을 집대성했다. (10장의 CD에 담긴 전통음악의 보고, 존 레비 컬렉션은 영국 에딘버러 대학에 보관돼 오다가 지난해 국내에서 발매됐다.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을 비롯해 신쾌동, 한일섭, 김소희, 박초월, 이창배, 김옥심, 이정열 등 국악 명인의 소리와 연주를 담았다.)



선생은 귀중한 국악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고, 국악 강연과 번역 작업을 계속 했다. 많은 국악 관련 도서들이 그에 의해 영역됐다. 그는 최근 그가 수집한 국악 릴 테이프와 문헌들을 국립국악원에 기증했다. 한국에서 결혼해 가정도 이루고 자녀들도 뒀다. 그의 장남 역시 국악을 공부했고, 현재 국립국악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1995년에는 귀화해서 법적으로도 한국인이 되었다. 그는 '서울 해씨'의 시조다. 원래 고향은 뉴욕이니 '뉴욕 해씨'라고 했어야 한다는 농담을 하곤 했단다.

그는 젊은 영혼을 사로잡았던 소리를 따라 한국까지 왔고, 이 곳에서 정착해 평생을 살아왔다. 서양음악도였던 그를 사로잡은 한국 음악의 매력은 무엇일까.

"한국음악, 특히 타악은 아주 이노베이션, 즉흥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요, 서양음악 중에 4분의 3박자는 그냥 똑같이 반복이에요.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 그런데 한국 민속악은 달라요. (직접 장단을 손으로 치면서) 반복이 없어요. 다 달라요. 예전에 제가 국립국악원 악사들한테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 들려주고 '이 음악 어떠십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어요. 이 음악이 좋기는 하지만, 왜 자꾸 반복을 합니까? 한국 음악에는 반복이 없어요. 쭉, 계속, 물 흐르듯 흘러가는데 반복이 없어요. (그는 인터뷰 도중 시조의 한 대목을 읊었다). 한국 음악, 정말 재미있습니다."

그는 요즘 '서양 음악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젊은 사람들이 별로 한국 전통 음악을 안 좋아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요즘 국악도 많이 변했다고 했다.

"요즘 국악 정말 많이 달라졌어요. 아시다시피 TV에서 라디오에서 서양음악 너무 많이 들으니까 작곡하는 것도 예전의 한국 음악하고 달라요. 서양 음악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래도 괜찮은 곡들이 있긴 한데, 전통 한국 음악은 잘 못 만들어요. 젊은 사람들이 예전 가락도 연구해야 해요."

아무리 한국인이라지만, 생김새는 분명히 서양 할아버지인 선생에게서 '요즘 젊은 사람들이 우리 전통 음악을 많이 안 들어서 안타깝다'는 얘기를 듣게 되다니. 그는 웬만한 한국인보다 더 한국인 같았다. 그는 지금도 연구할 게 많다고 했다. 우선 전국민속예술축제 50년사 영역을 마쳐야 한다고 했다. 그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

"옛날 가락, 잊어버린 가락 너무 많습니다. 다시 연구하고 악보도 써야 해요. 가야금 정악 산조 가야금 악보도 쓰고, 양금도 정악 악보 써야 해요. 할 일이 많은데 기운이 별로 없어서..... 눈도 약하고.....속도는 못 내고, 살살 해야죠."

선생은 그래서 오늘 경복궁에서 열리는 세종조 회례연도 가서 녹음을 할 것이라고 했다. 한창 인터뷰를 하고 있는데 잠깐 외출했던 부인이 돌아왔다. 부인은 선생이 경복궁에 공연을 보러 간다는 얘기를 듣고는 난감해 했다. 날씨도 더운 데다 전날 팔순 잔치 치르느라 피곤했을 터인데, 그냥 집에서 쉬는 게 좋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녹음기까지 꺼내놓은 선생은 몇 달 전부터 기다려왔던 공연이니 꼭 보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내가 나섰다. 어차피 공연까지 취재하려던 참이었으니 우리가 경복궁까지 잘 모시고 갔다 오겠다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선생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녹음기를 챙겨들고 우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취재 차량에 함께 탄 그는 가는 길 내내 공연 시간에 늦는 건 아닌지 조바심을 내는 것 같았다.

경복궁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니, 날씨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웠다. 선생은 허리가 많이 굽은 데다 기운이 없어 빨리 걷지 못했다. 그를 부축해서 근정전까지 걸어들어가는 길은 생각보다 멀었다. "선생님, 조심하세요. 턱이 있어요." "다음엔 계단이예요. 괜찮으세요?" "힘들지 않으세요? 조금만 더 가면 돼요." 하면서 선생을 부축해 한참을 걷다 보니, 마치 우리 할아버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근정전에 도착. 이미 회례연은 시작되었다. 국악원 진행요원 한 명이 금방 선생을 알아보고는 앉으실 자리가 따로 없는데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 우리는 약간의 그늘이 있는 건물 밑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선생은 항상 갖고 다니는 지팡이 겸 간이의자를 펴고 앉았다. 이 공연을 주관한 국립국악원 팀으로 현장에서 일하던 선생의 아들이 우리를 보고는 놀라 달려왔다.

공연하는 사람들도, 지켜보는 사람들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선생은 더운 날씨에도 아랑곳않고 녹음기를 꺼내들었다. 눈길은 흔들리지 않고 공연을 응시했다. 선생의 옆자리에 앉은 어린 여자아이가 한복 차림의 서양 할아버지가 신기한지 계속 빤히 쳐다봤다. 선생의 아들은 '이걸 예전부터 그렇게 보고 싶어하셨어요. 우리가 다 찍어서 나중에 드린다고 하는데도, 기어이 직접 봐야겠다고 하시더니....." 했다.

공연은 예정보다 일찍 끝났다. 더위 때문에 혹시라도 탈진하는 사람이 나올까 봐 공연 시간을 줄였다고 한다. 나는 공연을 본 소감을 듣기 위해 선생에게 짧은 인터뷰를 다시 부탁했다. 선생은 경복궁 건물을 배경으로 간이의자를 놓고 앉았다.

"한국 무용과 음악, 정말 우아하고 좋았습니다. 오늘 녹음한 건 제 연구에 사용할 겁니다. 역사적으로 전통 음악과 무용이 의식에서 어떻게 사용됐는지 공부할 겁니다."

"공부 이미 많이 하셨는데, 아직 공부할 게 많으세요?"

"한국음악에는 넓은 사상이 있고, 죽을 때까지 연구 해도 못 끝낼 것 같습니다. 내 생각엔."

나는 여기까지 듣고는 인터뷰를 마쳤다. 더 이상 하는 건 무리일 것 같았다. 선생은 아까보다 눈에 띄게 피로해진 기색이었다. 선생의 아들은 '내가 아버지를 모시고 가야 하는데, 공연 마무리 때문에 그럴 수가 없다'면서 계속 우리에게 미안해 했다. 사실 나는 이 아버지와 아들을 같이 인터뷰하고 싶었지만, 아들은 이번에도 인터뷰를 사양했다. 어쩔 수 없이 '대를 이은 국악 사랑'까지는 리포트에 담지 못했다.

나는 다시 선생을 부축해 주차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가는 길은 올 때보다 좀 더 멀게 느껴졌고,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나는 살짝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오늘 무리하신 건 아닌가. 이러다가 무슨 탈 나시면 어떻게 하나. "선생님, 더우시죠?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여기 내려가실 때 조심하세요" "이제 거의 다 왔어요." " 아, 차는 저 쪽에 있네요. 저기 보이시죠?"

일단 차에 오르자 선생의 자택까지 가는 길은 금방이었다. 차가 많지 않아 곧 도착했다. 선생을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나오려 하는데, 부인이 저녁밥을 먹고 가라고 권한다. 선생도 같이 식사하자고 우리를 붙잡았다.

"아유, 괜찮아요. 저흰 또 회사에 들어가 봐야 하거든요. 인터뷰하신 건 방송 나올 때 알려드릴게요.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회사로 돌아오면서, 나는 몇 년 전에 인터뷰했던 로이 토비아스 선생을 떠올렸다. 한국 발레계의 큰 스승이었던 그 역시 미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제자들의 나라 한국으로 귀화해 '이용재'라는 이름의 한국인으로 살았다. 처음 인터뷰 요청을 한 지 몇 년이 지나서야 성사됐던 이 인터뷰는, 내 기자 생활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터뷰 중 하나다. 내가 기자가 된 보람을 느끼게 했던 인터뷰랄까.

이번에 해의만 선생과 한 인터뷰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나는 그를 인터뷰하면서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젊은 미국인 음악도 알란 헤이먼을 한국까지 이끌었던 인연. 그를 한국인으로 살아가게 했던 인연. 내가 선생에 대해 알게 된 인연. 내가 그를 인터뷰하고, 함께 경복궁에서 세종조 회례연을 보도록 이끈 인연. 웬지 가슴 한구석이 아련해진다. 아무래도 나는 그를 취재하는 동안 정이 좀 들었나 보다.

바라건대, 젋은이들이 지금보다 더 국악에 관심을 가져서 그가 안타까워하지 않아도 되기를. 아니, 그저, 해의만 선생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만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기를. 그리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국악을 원 없이 연구할 수 있도록 오래도록 건강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