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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복권 당첨금, 연금처럼 받는다

- 연금식 복권 7월부터 판매 시작

[취재파일] 복권 당첨금, 연금처럼 받는다

지난 10년간 우리 사회에 등장했던 캐치프레이즈 중 소비자들의 마음을 가장 잘 '캐치'한 '프레이즈' 중 하나로 로또가 내걸었던 "인생역전"을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거액의 돈이 얻어걸리면 인생이 '한 방'에 달라질 수 있다는, 꿈보다 더 꿈 같은 꿈. 그래도 그런 꿈을 현실로 살게 되는 누군가가 거의 매주 등장한다고 하니 더욱 버릴 수 없게 되는 그 대박의 꿈을 그야말로 한 마디로 응축하고 있는 말이죠.

당첨금의 제한이 없는 추첨식 복권인 로또는 지난 2002년 말 국내 출범 이후 서민의 폐부를 찌르는 이 한 마디를 타고 열풍을 일으키며 우리 나라 복권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출시 8년 만인 지난해, 기획재정부 복권위원회가 발표한 로또 판매액은 2조 4316억 원. 전체 복권판매액의 96.3%입니다. 수익금 비중은 더 높아 전체의 99.4%, 1조 285억 원에 이릅니다. (연간 당첨금은 1조 2754억 원이었습니다. 네, 정말 그 돈을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긴 있는 거군요.)

이렇다 보니 다른 복권들도 로또와 차별되는 소구력을 갖는 상품 개발에 나서게 됩니다. 정액 당첨금이라는 틀 안에서, 로또가 갖지 못한 장점을 내세울 수 있는 복권 말입니다. 그런 상품으로 출범하는 게, 몇 차례 사업시기 조정 끝에 다음달부터 발매하기로 한 연금형 복권 '연금복권 520'입니다.

복권위원회 산하 복권사업자 중 하나인 연합복권이 판매하는 이 복권은 이름 안에 명시된 대로 1등 당첨자가 '매달 500만 원을 20년 동안 연금처럼' 받는 추첨식 복권입니다. 7월 첫 수요일인 7월 6일 첫 추첨을 시작해 그 이후로는 매주 수요일 추첨을 진행합니다.

무지개의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로 구별되는 7개 조의 복권이 장당 1000원에 발행되는데, 일단 조가 맞고, 복권에 쓰인 6열의 숫자가 모두 맞으면 1등입니다. 1등은 2명으로, 이들에게 매달 500만 원씩 20년 동안 당첨금을 지급합니다. 물론 1등이 안 나오는 주도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로또처럼 당첨금이 이월되진 않습니다. 당첨금이 정해진 복권인 겁니다.

1등의 당첨금을 단순 계산으로 목돈 환산하면 7억 2천만 원, 복권위원회가 산정한 할인율을 적용하면 총액 7억 9천만 원 규모의 액수입니다. 1등이 여럿 나왔을 때의 로또 수준은 됩니다.

2등부터는 여태까지의 다른 복권들과 마찬가지로 당첨금을 한꺼번에 지급하는데, 2등 4명에 1억 원씩, 3등 7명에 천만 원씩... 이렇게 액수는 급격히 줄어들어 복권값 1천 원만 돌려받게 되는 7등까지 뽑습니다. 이 복권이 나오는 대신, 매년 매출액이 줄어들어온 연합복권의 인쇄식 복권 '팝콘'-주택복권을 계승한 복권이죠-은 사라집니다.

이런 연금식 복권은 사실 국내에서 처음 개발된 건 아니고, 외국 복권시장에선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상품이 내세우는 점은 '인생역전 뒤의 역풍을 방지한다'는 것입니다.

로또 당첨금을 둘러싼 친지간 참극이나, 로또 당첨금을 탕진하고 당첨 전보다 더 비참한 지경으로 굴러떨어진 사람들의 이야기,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만큼 종종 접하게 되죠. 갑자기 생각지도 못했던 거액의 돈이 삶에 뚝 떨어졌을 때, 그런 돈을 만져본 적도 관리해 본 적도 없는 당첨자와 주변 사람들의 인간관계와 생활방식이 근본부터 바뀌면서 발생하는 부작용의 비극 말입니다.

연금복권은 이처럼 '인생역전'이 '패가망신'으로 이어지는 '일확천금'이 아니라, 생활의 냄새가 나는 '연금 제공'을 표방합니다. 고령화시대 노후에 대한 불안을 공략한다는 겁니다. 인생이 역전되진 않겠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은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겁니다.

이런 취지를 살리기 위해, 1등 당첨자가 당첨금을 담보로 거액의 돈을 빌리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채권자가 매달 압류에 들어갈 수는 있습니다-.-;) 대신 당첨자가 사망해도, 이 '연금'의 잔액은 민법에 준해 지정된 상속인에게 계속 지급됩니다. 만약 정부 정책 변경으로 상품이 사라지거나 할 경우에만 잔액을 목돈으로 지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소비자들의 반응은 어떨까요. 노후를 걱정하는 중장년층을 공략하면 승산이 있다는 게 복권위원회의 생각입니다. 사행성이 덜 한 것으로 느껴진다는 점에서, 제 주변의 반응도 대체로 긍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취재 과정에서 제 뇌리에 가장 강렬히 남은 것은 거리에서 인터뷰했던 한 중년 남성의 얘기였습니다. 그 분은 앞으로도 단호히 로또를 고집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연금? 그것도 노후 걱정을 할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얘기지. 지금 당장 먹고 살 게 없고 기반이 없는 사람들한텐 와닿지 않아요. 집은 사야죠. 애들한테 줄 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로또가 돼야죠, 로또가!"

'노후 걱정을 할 수 있는 것'도 여유일 만큼 팍팍한 삶. 매일 접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기계적으로 다루게 되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통계 속 비정규직과 일용직 노동자들, 불법 파견의 끝에 심신을 다친 사람들, 지난 몇년간 시끄러웠던 '옛날 대기업'들의 정리해고자 상당수가 오늘도 어디선가 로또를 사고 있겠구나, 그들에겐 내일에 대한 걱정마저도 오늘의 사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자 문득 마음이 싸했습니다.

사실 저는 취재를 위해 구입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복권을 사 본 적이 없습니다. 취재시 구입한 것도 같이 취재나온 일행들에게 나눠드리곤 했습니다.

이것은 제 나름의 미신입니다. (물론 김칫국 중의 김칫국이지만) 왠지 인생이 역전될 만큼 거액의 돈을 한 번에 따고 나면 내 행운을 거기에 다 소진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미신 말입니다. 내 인생의 행운이 얼마만큼 될 진 모르지만, 그런 게 좀 있다면 한 번에 확 써버리는 대신 아끼고 아껴서 뭔가 멋진 일이 여러 가지로, 가끔씩 생겼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서요.

"복권에 당첨돼 잘 살게 됐다"는 뭔가 비문처럼 느껴질 만큼 와닿지가 않잖아요. 그냥 소소하게 "월급이 조금 올라서 지난해보단 윤택해졌다"는 정도가 제게 와닿는, '그럴 수 있을 듯한' 멋진 일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의 미신도 사치이고, 이 그럴 듯한 일이 그럴 듯하게 일어나주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너무 많다 보니 로또의 인기는 오늘도 식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 복권 취재의 제 결론은, 엉뚱하게도, '그럴 듯한 행복'을 저를 포함해 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는 세상, 복권 당첨보다 더 '그럴 듯한' 꿈을 꿀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을 보고 싶다는 새삼스런 희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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