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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오바마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니깐…"

정치적 의혹의 끈질긴 생명력에 관하여…

[취재파일] 오바마 "하와이에서 태어났다니깐…"

위의 사진들은 이틀 전 백악관에서 열렸던 부활절 맞이 달걀 굴리기 행사장의 모습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부활절 토끼의 귀를 마이크처럼 사용하고, 두 딸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백악관을 찾은 어린아이들과 장난을 치고 있습니다. 백악관의 부활절 맞이 달걀 굴리기 행사는 1814년 미국의 4대 대통령이었던 제임스 매디슨의 부인 몰리 매디슨이 시작했다고 합니다. 200년 가까이 된 역사가 깊은 행사더군요.

하지만 이 날 오바마 대통령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바로 하루전 부활절 당일 아침에 방영된 ABC방송의 인터뷰 때문입니다.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빌리 그레이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그레이함 목사는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의혹에 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개 있는데 출생의혹도 빨리 해결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 언론들은 그레이함 목사가 출생 의혹을 제기하고 있는 Birther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고 분석했습니다.

당장 백악관은 불쾌한 기색을 나타냈습니다. 그 다음날 (그러니까 오바마 대통령이 아이들과 백악관에서 부활절 맞이 행사를 하고 있을 때)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종교 지도자가 부활절 아침에 터무니 없는 주장에 관한 얘기를 했다는 것 자체가 유감스럽다."고 했습니다.

사실 그레이함 목사는 출생 의혹보다 더 센 얘기를 하나 더 했습니다. 바로 오바마 대통령의 종교에 관한 문제였는데요, "오바마 대통령은 저에게도 자신이 크리스천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이 교회를 가니까 크리스천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요, 저에게 크리스천이란 하나님에게 자신의 삶을 맡기고 하나님을 유일한 구세주로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가슴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실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백악관은 반응을 했습니다. 역시 제이 카니 대변인의 말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부활절 당일 실로 침례교회에 가서 부활절 예배를 봤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갔습니다. 모든 미국인들이 봤을 겁니다.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그리고 미국의 모든 크리스천과 마찬가지로 부활절은 중요한 날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산안과 재정 적자 문제, 중동의 민주화, 북한 핵문제 등 복잡한 국내외적 현안들이 산적해 있는데 오바마 대통령과 백악관이 하루이틀 전에 반응한 두 가지 사안은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즉,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선언한 가운데 해결해야 하는 문제중 핵심적(?)인 두 가지가 바로 출생 의혹과 종교 문제라는 겁니다.

출생 의혹이란 "오바마가 하와이가 아니라 아버지의 고향인 케냐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들만 대통령과 부통령을 할 수 있다는 미국 헌법에 따라 오바마는 대통령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 문제는 "오바마가 사실은 크리스천이 아니라 이슬람 교도"라는 주장입니다.

올 들어 오바마 대통령은 자신의 종교 문제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서너 차례 얘기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더욱 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됐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께 길을 알려달라고 기도한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최근에는 출생 의혹 문제가 더욱 큰 현안으로 다가왔습니다. 공화당 대선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부동산 재벌 도널드 트럼프가 Birther들(강경 보수파들이 대부분입니다.)의 심리를 겨냥해 출생 의혹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급기야 그레이함 목사까지 가세하면서 더욱 커졌죠.

그런데 백악관이 그레이함 목사에게 불쾌감을 드러낸 뒤로 정작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의혹에 관해 "오바마는 하와이 출생이 맞다."고 먼저 얘기한 것은 백악관이 아니라 CNN이었습니다. 하와이 현지 심층 취재를 통해 공화당원인 전 하와이 보건부 국장, 오바마의 하와이 출생 소식을 담은 신문의 당시 기자, 오바마의 모친과 친했던 사람, 오바마가 태어난 병원에서 비슷한 때 아기를 낳은 할머니 등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서 "오바마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와이 출생"이라고 보도했던 거죠.

그 보도가 나간 뒤 하루만인 오늘 백악관이 가세했습니다. 바로 오바마의 출생기록부를 공개한 것입니다. 오바마의 개인 참모가 직접 하와이로 가서 입수한 것이라고 하는데요,아래 사진이 그 기록부입니다.


          

Barack Obama's birth certificate


글씨가 작아 잘 보이지는 않지만 이 기록부에 따르면 오바마는 1961년 8월 4일 오후 7시 24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난 것으로 돼 있습니다. 하와이 당국이 공인한 문건이다 보니 더 이상 확실한 물증은 없는 셈입니다. 문건이 공개된 직후 오바마 대통령이 스스로 백악관 기자실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난 2년반 동안 당혹감을 갖고 이 문제를 지켜봤고, 출생 의혹이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을 보고 곤혹스러웠다. 나는 하와이에서, 1961년 8월 4일 카피올라니병원에서 태어났다.다른 할 일이 많기 때문에 통상적으로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예산안 처리, 재정적자 문제 등과 같은 중요한 사안이 뉴스가 되는 게 아니라 내 출생 문제가 주된 관심사였기 때문에 분명히 하고 싶었다. 지금 미국은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바보짓을 할 시간이 없다."

출생기록부까지 공개했으니 더 이상 자신의 출생 문제를 놓고 왈가왈부하지 말고 이제는 미국의 나갈 길, 자신이 내놓는 정책의 이념성 이런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자는 뜻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Birther들은 전혀 그럴 의사가 없어 보입니다. 당장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주장에 따라 백악관이 출생기록부를 공개한 상황까지 왔다면서 자화자찬하면서 "놀라운 것은 이런 문건이 갑자기 나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건이 진짜인지 조사해봐야 하는 것 아니냐?"면서 전혀 자신의 주장을 되물릴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습니다.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폭스뉴스의 오피니언란에는 "이런 문건이 있었다면 왜 대통령이 된 지 2년 반이 지나서야 공개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뭔가 숨길 사연이 있어서 그랬던 것 아니냐?"는 의견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백악관은 확실한 문건을 공개한 만큼 이제는 오바마 대통령의 출생 문제를 둘러싼 논란이 그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상황은 그 기대와는 다르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모습은 정치인에게, 그 것도 중요한 정치지도자를 겨냥해 제기된 정치적 의혹은 그것을 반박할 확실한 물증이 제시되더라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고 계속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정치의 속성이 정치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 근거가 있든, 없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해 숱한 의혹을 제기하도록 유혹하고 있다는 사실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치 선진국이라고 하는 미국에서,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어떻게 보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출생지 문제를 놓고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근거를 내놓았는데도 반대 세력은 꿈쩍도 않고 있습니다. 결국 정치적 의혹을 판단하는 일은 유권자들에게 맡겨져 있다는 것이지요.  오바마나 백악관도 답답하겠지만, 지켜보는 이방인의 가슴도 편하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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