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런 수습 생활을 거치면서 정말 하기 싫고 어려운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유족을 통해 죽음의 이유를 좀 더 가까이 취재하자는 것인데, 슬픔에 잠겨 있는 유족들에게 이것저것 캐묻는다는 건 아무리 기자라고 해도 너무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수습기자들에게 장례식장은 '슬픔과 이별의 장소' 동시에 '어렵고 힘든 장소'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요즘 한국 영화 속 장례식장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공간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지만, 그 이별이 한없이 슬프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남겨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찾아주고, 새로운 시작을 하게 하는 장소가 되고 있습니다.
영화보다 소설로 먼저 나왔던 <마이 블랙 미니드레스>의 장례식장은 동창회장이나 파티 같은 분위기입니다. 방송작가를 꿈꾸던 친구의 자살. 현실의 벽에 부딪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를 위해 주인공은 학창 시절을 함께 보냈던 친구들을 장례식장으로 부릅니다. 친구의 가는 길 따뜻하게 배웅해 주자는 것이죠.
친구들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친구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친구가 떠나는 길을 외롭지 않게 해줍니다. 심지어 스타가 된 친구는 국화로 장식한 근조화환 대신 알록달록한 꽃으로 장식한 화환을 보냈습니다. 피어나는 꽃을 표현해야 하는 사진 촬영을 하다 왔다며 파란색 눈 화장에 노란색 드레스까지 입고 나타났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20대에 세상을 등진 친구의 가는 길이 어둡고 슬프지만은 않게 해주려는 것이었겠죠. 심지어 그동안 고민을 떠안고 살던 24살의 주인공 네 명은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미래를 위한 건배까지 합니다.
일부 평론에서는 장례식장에서 시끌벅적하게 건배를 하는 모습이 아무리 영화라 해도 눈살이 찌푸려진다고 썼습니다. 장례식장에서 지킬 예절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말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는 듯합니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그 친구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는 것. 떠난 친구도 그리 나쁘게 볼 것만 같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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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달 개봉할 영화 <써니>에서는 장례식장이 댄스 무대로 등장합니다. 25년 만에 만난 여고시절 단짝친구. 다시 만나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친구는 암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80년대 디스코바지를 입고, 일명 닭 벼슬 머리를 하고, 유행가에 맞춰 춤도 추면서, 고민과 웃음을 함께 나누던 여고 친구들, 세월 앞에 학창시절 꿈꾸던 모습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서로의 앞에 섰습니다.
누구는 잘 산다고 잘난 척 하지 않고, 누구는 못 산다고 숨지도 않습니다. 학창시절 그 때처럼 그저 '친구'로 모였습니다. 40년 남짓한 짧은 인생을 살다 간 친구는 남겨진 친구들에게 '내 몫까지 잘 살아 달라', '예전의 꿈을 잊지 말고 살아 달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마지막 유언이 있습니다. 학창시절 함께 추던 그 춤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도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친구의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 앞에서 장례식장에 모인 친구들은 상복을 입은 채 춤을 춥니다. 마치 떠난 친구도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 남겨진 사람들은 죽은 자를 잊고 어떻게든 잘 살아간다고, 죽은 사람만 잊힌다고 흔히들 말합니다. 그런데 영화 속 밝고 즐거운 장례식장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은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긴 하지만, 남겨진 사람들을 절망하게만 하는 죽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죽음은 그 사람을 추억하는 동시에, 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고 말해주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