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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워싱턴DC 시장이 체포된 이유

워싱턴 DC의 독특한 위상

[취재파일] 워싱턴DC 시장이 체포된 이유

양복 입은 신사가 경찰들에게 체포됩니다. 수갑까지 채워졌습니다. 체포된 사람은 다름아닌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의 그레이 시장입니다. 지난해 11월 선거를 통해 당선됐습니다. 체포된 시점은 지난 11일 월요일입니다. 지난 주말 오바마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 속에 미국 민주당과 공화당이 극적으로 예산안 삭감에 타협하지 않았다면 연방정부가 문을 닫기 시작했을 날이죠.

이날 저녁 그레이 시장과 40명의 워싱턴DC 의회 의원들이 미국 연방의회가 있는 워싱턴DC 컨스티튜션 애브뉴에서 줄 지어 시위를 벌이다가 체포됐습니다. 불법집회로 도로를 막은 혐의라고 이들을 체포한 의회 경찰 측은 설명했습니다.

체포된 뒤 밤 11시 15분쯤에는 다른 곳으로 이감되기도 했는데요, 어쨌든 그 다음날 석방됐습니다. 이들이 어떤 이유로 석방됐는지는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다만 적은 액수의 벌금을 내는 대신 혐의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옵션을 선택하지 않았겠느냐는 관측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체포를 자청한 시위를 벌였을까요?

그것은 오바마 대통령과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 사이에 이뤄진 예산 삭감안 때문이었습니다. 연방정부의 폐쇄를 막기 위한 타협 속에 저소득층 여성들의 낙태를 지원해줄 예산이 전액 삭감됐고, 자치권이 없는 워싱턴DC가 직격탄을 맞았기 때문입니다.

2009년에 연방의회는 워싱턴DC에 해당분야에 18만8천 달러의 예산을 배정해줬습니다. 하지만 이번 타협으로 워싱턴DC는 단 한 푼도 이 분야에 쓸 수 없게 됐습니다. 백악관의 카니 대변인이 " 워싱턴DC의 저소득층 여성 낙태지원 예산을 삭감한 것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매우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타협하면서 선택을 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라고 일부러 설명까지 했지만 워싱턴DC 지도층들의 분노를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더 이상 워싱턴DC가 정치적 게임의 볼모가 되는 일을 앉아서 당하지는 않겠다."는 게 이 날 시위의 가장 큰 구호였습니다. 그리고 워싱턴DC의 자치권을 반드시 확보하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습니다.

여기에는 워싱턴 DC의 독특한 위상이 반영돼 있습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지정해 1790년 미국의 수도가 됐지만, 정식 연방 주가 아니어서 자신들을 대표할 상원의원이 없습니다. 지난한 투쟁 끝에 1973년이 돼서야 자치법이 통과돼서 간신히 하원 의원을 한 명 갖게 됐지만 투표권이 없습니다.

이런 분노의 감정들이 워싱턴DC 시민들에게는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워싱턴DC에 적을 둔 자동차 번호판입니다. "우리는 대표가 없이 세금만 내고 있다.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 는 내용이 번호판에 새겨져 있습니다. 전직 시장은 아예 이 구호를 의사당 근처 거리 이름으로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기도 했으니 워싱턴DC 시장이 되려는 사람들은 이런 시민들의 정서를 너무도 잘 알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입법, 사법, 행정부는 물론 세계 각국 대사관이 모여있는 미국의 수도지만, 제대로 된 대표 한 명 없는 허울뿐인 수도, 그래서 거기에 살고 있는 시민들도 자부심보다는 이런 저런 불이익을 받는다는 반감을 갖고 있는 것이죠.

특히 워싱턴DC를 형성하고 있는 4개 구역중 백인, 중산층들이 모여사는 북서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흑인과 히스패닉계가  다수인 상대적 혹은 절대적 빈곤지역입니다. 50만 인구의 대다수가 저소득층이어서 정부의 지원이 필수적인데, 이번 예산안 타협 과정에서 워싱턴DC가 피해를 봤다는 공감대가 시장과 시의원들의 시위를 이끌어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시위는 'DC Vote'라는 시민단체가 주도했습니다. 워싱턴DC에도 투표권 있는 하원의원을 배정해달라는 운동을 하고 있는 단체입니다.

그레이 시장은 석방된 뒤 기자들과 만나 "이번 운동은 절대적으로 DC Vote와 함께 하고 있으며 월요일 시위로 끝난 게 아니다. 제가 체포된 것은 앞으로 진행될 긴 싸움의 신호탄에 불과합니다. 우리 모두가 일어설 때입니다. 이집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미국은 아프간과 이라크에 미군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국으로 다시 돌아옵니다.그런데 워싱턴DC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졸지에 2등 시민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레이 시장의 발언에 맞춰 DC vote측도 이번 주 금요일에 대학생들과 연계한 또 다른 시위를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레이 시장과 함께 체포됐던 마이클 브라운 시의원이라는 사람은 "이번 싸움은 DC 역사상 가장 큰 싸움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싸움 말입니다."

이렇게 DC 시민들의 정서를 십분 활용한 시위는 그레이 시장의 입지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사실 한달 전만 해도 그레이 시장은 지난해 11월 선거과정에서 당시 현직 시장을 제치기 위해 그와 지지기반이 겹치는 제 3의 후보에게 선거비용을 대준 것은 물론 선거전을 끝까지 뛰고 자신이 당선되고 나면 좋은 자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이번 시위로 DC시민들 상당수가 그레이 시장에 대해  안 좋았던 기억을 떨쳐버리고 DC의 자치권 확보라는 정치적 이슈 아래 하나가 되는 듯한 상황이 조성된만큼 그레이 시장은 손해볼 게 없죠. 물론 그런 그레이 시장의 부도덕성을 여전히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이번 예산안 타협과정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나라를 위한 중재자로,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타협하면서도 공화당 목표를 충분히 달성했다는 정치력의 보유자라는 이미지로 점수를 땄다고 합니다. 빈센트 그레이 워싱턴DC 시장도 예산안 타협의 수혜자 명단에 추가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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