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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투서, 뜯어보기는 하는데…

[취재파일] 투서, 뜯어보기는 하는데…
투서는 일반적으로 조직사회 안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겨누는 검입니다. 칼을 칼집에서 뽑은 이상 칼은 받는 사람이든 겨누는 사람이든 상처를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개인과 개인만 피해를 입는 것이 아닙니다. 조직이 와해되고 혼란스러워 집니다. 원인 제공자에 대한 조직 내부의 복수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칼은 마지막에 뽑는 최후의 수단입니다.

일반적으로 투서라는 칼을 뽑은 약자가 이길 확률은 극히 낮습니다. 서로 죽거나 투서를 쓴 사람만 바보가 됩니다. 내부고발자에 대한 인식이 정의로운 사람이라기 보다는 공공의 적으로 낙인받기 십상입니다.

그래서 투서에 대한 조사는 일반적으로 내부고발자 보호를 위해 익명으로 진행됩니다. 익명의 투서를 받아 진상을 조사하는 감사 당국이 당사자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입니다.

자칫하면 손해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특히 서슬퍼런 국가기관 내부에서의 투서는 흔치 않습니다. 이 때문에 투서가 나올 정도면 보통 '얼마나 부패했으면...', '오죽했으면...' 정도의 시선으로 사안을 바라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잘못된 애정관계'로부터 비롯된 투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지난해 말 장성진급을 앞두고 한 통의 투서가 육군에 들어왔습니다. 준장 진급을 앞둔 모 대령의 부대비 횡령 의혹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부대 비용 1억 2천만 원을 빼돌려 백화점 상품권을 대량으로 구입했는데 모 대령이 이 상품권을 유력 장성들에게 전방위 로비를 벌였다고 폭로한 것입니다.

투서를 받고 조사에 착수한 군은 무혐의로 결론내렸습니다. 무혐의라는 뜻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 대령은 횡령한 사실이 없다. 둘째 횡령액이 처벌을 전제할 만큼 큰 액수가 아니다.

어쨌든 1억 2천만 원의 부대 비용 횡령 의혹은 일단 묻히는 듯 했습니다. 이른바 준장 진급을 앞둔 잘 나가는 군인에 대한 모함으로 비춰졌습니다. 모 대령은 얼마 뒤 준장으로 진급했습니다.

보고를 받은 김관진 국방장관은 크게 화를 냈습니다. 조직을 와해하는 근거없는 폭로와 투서에 길들여진 나쁜 군인들을 색출하라는 지시였습니다. 이번에는 국방부 조사본부가 나섰습니다.

수사방향은 투서를 쓴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역시 적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했던가요? 준장 진급한 모 대령과 같이 일했던 후배로 드러났습니다.

그런데 조사 결과가 조금 엉뚱하게 나왔습니다.

1. 준장 진급한 모 대령이 전역하기로 결정했다.
2. 투서를 보낸 사람은 피의자가 아닌 제보자다.

국방부 조사본부의 결정은 이렇습니다.

"투서를 보낸 제보자를 불러서 진상 파악을 해보니 횡령 의혹이 일정 부분 신빙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핵심 당사자인 모 준장이 전역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해 군인 신분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조사할 필요가 없어졌다."

솔직하게 말하면 좋은 게 좋다고, 문제가 된 준장이 옷 벗는 것으로 사건을 덮는다는 취지였습니다. 민간 수사기관이었다면 대충 사건을 덮었다고 난리가 날 겁니다.

외압 의혹부터 시작해 언론의 뭇매를 맞았을 것이고 수사 보고 라인에 있던 사람들은 줄줄히 옷을 벗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국방부는 오히려 아무 문제없이 조용히 처리해 나가는 이런 방식의 수사를 자랑스러워라도 하는 듯 기자들의 계속된 질문공세에 더 이상의 답변은 하지 않았습니다. 사건은 이렇게 묻히는 듯 했습니다.

불현듯 어제 오후 김관진 장관이 장성 진급비리 의혹에 대해 재조사를 지시했습니다. 조사 주체를 국방부 조사본부가 아닌 감사실로 바꿨습니다. 국방부는 오늘부터 본격적인 진상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습니다.

의혹의 핵심은 부대운영비 횡령의혹과 유력 장성들을 상대로 한 진급 로비 의혹 두 가지입니다. 의혹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는 처음 투서가 접수됐을 때 무혐의로 결론내렸던 조사라인에 있는 장성도 일부 포함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과가 사실로 드러나면 처음 투서를 조사했던 관계자들과 진급 로비 의혹과 관련된 일부 장성들까지 낙마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일단 국방부 감사실의 조사 결과를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납득되지 않는 것은 의혹이 있는데 조사를 덮는 군의 관행화된 식구 챙기기와 없다던 투서 의혹이 장관의 지시 한 마디에 특별 조사반까지 구성되는 군의 불편한 '노예근성'입니다.

국방개혁 307을 발표한 지 한 달째입니다. 국방개혁의 갈 길이 참 멀어 보여 출입기자로서 참 답답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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