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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승부사 '김종훈' 고개 숙였지만...

한EU FTA 번역오류 논란

[취재파일] 승부사 '김종훈' 고개 숙였지만...

한-EU FTA  협정문 한글본에 번역 오류가 있다는 것은 지난 2월 민간의 한 통상법 전문변호사에 의해 제기됐습니다. 한 칠레 FTA 때도 스페인어 번역오류가 뒤늦게 발견돼 협정 체결 뒤에 오류 수정을 위한 각서를 교환하는 등 외통부에서 번역오류는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런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라는 식의 대응이 화를 더 키웠습니다. 통상교섭본부는 어차피 법적 효력이 있는 통상법상 언어는 '영어'라며 한글본은 워낙 방대하고 인력이 부족해 실수가 있을 수 있다 그런 해명만을 했습니다.

하지만 통상교섭본부에 120명, 국제법률국에 30여 명의 전문 인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명의 민간 변호사가 지적한 번역 오류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이런 여론은 의식한 듯 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은 기자회견을 자청해 그간의 번역오류 조사 결과와 향후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했습니다.

유례없이 무거운 표정과 발걸음으로 비장하게 기자회견장에 들어선 김 본부장은 "재검독 실시 결과 다수의 오류가 발견됐다"며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깊이 사과드린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도 서너 차례나 숙이면서 사과의 마음이 진심임을 거듭 강조했습니다.

한미 FTA 등 굵직한 대외협상을 진두지휘하면서 김종훈 본부장이 얻게 된 별명은 '승부사', '검투사' 등. 냉철한 판단력이 요구될 때 거침없이 행동에 옮긴다는 뜻으로 붙여진 별명들일 텐데, 오늘만은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조사를 다시 했더니  정정이 필요한 오류는 서비스 양허표 111건, 품목별 원산지 규정 64건, 협정문 본문 32건 등 총 207건이랍니다. 당초 민간에서 제기됐던 것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것입니다. 유형별로 보면 어려운 전문용어라기보다는 실소가 나오는 수준의 실수도 많습니다.

'공작기계(machine tools)'를 '공자기계'로, '광택재(polishing products)'를 '고아택재'로 맞춤법이 틀렸다거나 '이식(transplant)'을 '수혈'로 번역해놓는가 하면 '자회사(subsidiary)'를 현지법인으로 옮겨놨습니다. 식물성재료(vegetable materials)는 생뚱맞게 '식물성 기름의 재료'로 번역됐습니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는 경제개발협력기구로 앞뒤가 바뀌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정말 일이 많아서, 천장이 넘는 과도할 일감 때문에 오류가 발생했다는 말에 온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는 한-EU FTA는 예정대로 7월에 발효되어 유럽이라는 시장을 개척하는데 우리기업들에게 또 다른 기회가 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한-EU FTA에 대해서는 다른 국가와의 FTA에 비해 이런 공감대가 많이 형성돼 있습니다. 돼지고기 농가나 일부 피해업종이 예상되지만 업종상 보완관계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향후 대책을 잘 세워간다면 실보다는 득이 많을 것이란 전망입니다.

때문에 번역 오류가 있다는 이유로 국회 비준을 해줄 수 없다는 건 다소 이치에 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번역 오류는 그대로 징계하고 재발방지책을 마련하고, EU 측과의 일정약속이 있는 만큼 비준 동의는 진행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있기에 이번 통상교섭본부의 일처리가 더 실망스럽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번역문제로 국회에 비준동의안을 세 번씩 수정해서 다시 내고 다시 내고 데드라인에 임박해 처리를 요구하는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반대가 반드시 존재하는 FTA의 특성상 그런 부분을 설득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그런 쪽으로 보내야 할 시간이 엉뚱하게 영어사전 들여다보며 번역 흠잡기로 허송세월하고 있습니다.

김종훈 본부장은 7월 1일 예정대로 발효가 되려면 4월 국회 때 반드시 처리되어 관련 국내법 개정작업 등을 거칠 수 있다고 얘기하면서 거듭 4월 처리를 간곡히 요청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본중의 기본인 번역 작업을 제대로 해서 꼬투리 잡힐 일이 없었다면, 사회적으로 한-EU FTA로 인한 수혜 업종, 피해 업종에 대한 대책 논의를 더 하고, 그런 방안을 마련하는데 여론이 더 집중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부분에서 김 본부장은 할 말이 없게 됐습니다.

오랜 기간 성실하게 꼼꼼하게 준비해온 EU와의 FTA가 결국 마지막 '번역 논란' 때문에 허겁지겁 종지부를 찍는 인상을 남기게 됐습니다.

'설마 누가 천 페이지 넘는 깨알 같은 전문용어를 보겠어...'라는 공무원들의 인식이 여전하다는 점과, 깨알 같은 글씨를 실제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걸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을 이번 일은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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