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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대북 쌀 지원의 딜레마

[취재파일] 대북 쌀 지원의 딜레마

미국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 한국 정부와 발을 계속 맞춰 걸어가던 미국이 최근에 한두발 앞서 나가는 느낌이다. 북한 문제를 놓고서 말이다.

그제 미 상원에 출석한 보즈워스 대북정책 특별대표는 북한에 대한 인도주의적 쌀 지원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식량 지원은 정치적으로 고려할 사안이 아니라면서 쌀 지원에 대한 오바마 행정부의 입장이 부정적이지 않다는 점을 내비쳤다. 미 정부의 한반도 정책에 큰 영향을 미치는 캠벨 미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대북 쌀지원은 한국 정부와 긴밀히 협의하고 결정할 사안이라고 한발 빼긴 했지만 대북 식량지원에 대한 미국 정부의 싸인은 분명히 파란불이었다.

불과 한 달 전 방한했던 스타인버그 미 국무부 부장관은 북한이 식량지원을 요청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한국 정부는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 대한 식량지원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스타인버그 부장관은 한국과 미국은 찰떡같이 공조가 잘 되고 있다며 한국 정부에 힘을 실어주기도 했다. 며칠 뒤 캠벨 차관보 역시 "대북 쌀 지원 계획은 없다"며 쌀 지원 논란을 확인 사살까지 했다. 그런데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미국이 북한에 대해 쌀 지원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것이다.

지난 2008년 부시 행정부가 50만 톤의 쌀 지원을 약속했고 17만 톤이 전달됐다. 33만 톤이 '북한용'으로 남아 있는 상태다. 인도적인 식량지원과 정치적인 문제를 분리해서 대응하는 미국의 입장에서는 대북 쌀 지원이 비교적 용이한 상황이다. 2주 후면 나올 세계식량농업기구(FAO)와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식량 부족 상황 실사 보고서에 따라 결정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한국이다.

우리는 천안함 사태 이후 5.24 조치로 북한에 대한 모든 인도주의적 지원을 동결시켰다. 민간단체의 대북지원도 차단됐다. 연평도 포격사태까지 터진 상태라 우리 정부는 북한이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사태에 대한 책임있는 조치가 없으면 대북 식량지원은 없다고 곳곳에서 천명해 놓았다. 남북대화와 식량지원 등 남북간의 현안들이 모두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태에 묶여있는 상황이어서 우리 정부는 식량 지원만을 따로 떼어내 대응할 수 없는 처지다.

때문에  한국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미국이 대북 쌀지원은 정치적인 사안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쌀 지원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 대화다. 북한이 쌀지원에 대한 반대급부로 큰 선물을 주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상응하는 미국용 선물을 따로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중국이 줄기차게 한국 정부에게 대화하라고 압박하는 상황에서 믿고 있던 미국이 조금씩 북한 제재의 고삐를 풀고 대화로 나가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유엔 안보리에서 한미 협공작전도 중국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결국 대북제재위원회의 전문가 패널보고서 채택도 불발됐다. 한미 양국이 차선책으로 북핵규탄 의장성명 채택을 시도하고 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다. 채택 시도보다는 빨리 털고 가자는 느낌이 더 진하게 느껴질 정도다. 천안함과 연평도 사태, 그리고 북핵 문제를 풀기 위해 찰떡같이 붙어있던 한미 양국 사이에 조그만 균열이 가고 있는 것이다.

대화로 옮겨가고 있는 미국의 기류가 반영됐는지 이명박 대통령도 삼일절 경축사에서 천안함과 연평도를 빼고 북한과 언제든지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군사실무회담이 중단된 원인이 우리 측에 있다며 북한에 사과하듯 보안조사를 하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정부가 북한과의 대화를 더 적극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판이 돼 버렸다. 또, 천안함과 연평도 포격 사태의 사과도 꼭 받아야만 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북한은 여전히 요지부동이고 미국은 오히려 쌀을 주겠다고 나섰다. 그래서 요즘 외교부를 보고 있으면 '고립'이란 단어가 가끔 떠올라 걱정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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