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글 '발레 지젤의 막장 드라마 코드'에 이어 씁니다. 저는 발레 ‘지젤’을 보면서 ‘역시 철없는 남자들이 문제야’ 하는 생각을 새삼 했어요. 지난해 ‘라 바야데어’ ‘백조의 호수’를 볼 때 어렴풋이 떠올랐던 생각인데, 이번 ‘지젤’에서 다시 확인하게 됐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지젤’과 ‘라 바야데어’ ‘백조의 호수’는 등장인물도 배경도 크게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거든요.
이른바 ‘발레 블랑(백색 발레)’의 대표작들로 꼽히는 이 작품들은 모두 순백색의 무용수들이 푸르스름한 조명 아래 아스라이 빚어내는 군무가 유명합니다. ‘지젤’에선 밤의 숲을 떠도는 원혼 윌리들이, ‘백조의 호수’에선 진정한 사랑을 만나야만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백조들이, ‘라 바야데어’에선 ‘망령의 왕국’에 사는 넋들이 춤춥니다. 세속적인 인간과는 다른, 신비스러운 자태를 지닌 존재들이고, 몽환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한 장면들입니다.
공교롭게도 이 세 작품 모두 모두 철없는 남자의 배신 때문에 여성이 때론 죽음에까지 이르는 큰 상처를 받게 되지만, 이 여성은 끝까지 이 사랑을 간직하며 자신을 배신했던 남성을 용서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발레를 만든 남성들이 생각한 이상적인 여성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남성에게 배신 당해도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키는 헌신 청순 가련 비련형 여성.
지젤은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자신을 농락한 알브레히트를 죽어서도 지켜줍니다. 백조 오데트는 자신에게 사랑을 맹세했던 지그프리트 왕자가 금세 흑조 오딜에게 홀려 자신을 배신했는데도, 그를 지키기 위해 악마 로트바르트에 맞섭니다. 인도 사원의 무희 니키아는 전사 솔로르와 사랑의 약속을 맺지만, 솔로르는 왕의 뜻을 거스르지 못하고 감자티 공주와 결혼하며 니키아를 배신하지요. 니키아는 죽음을 당하고 솔로르는 마약에 취해 망령의 왕국을 환상으로 봅니다. 망령이 된 니키아는 솔로르를 용서하고 함께 사랑의 춤을 춥니다.
약간 얘기가 빗나가는 감이 있기는 합니다만, ‘남성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상’ 얘기를 하다 보니 며칠 전 오페라 ‘투란도트’에 대해 오페라 해설가 유정우 씨가 한 얘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세기의 한량이었던 푸치니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여성상이 바로 오페라 ‘투란도트’에 등장하는 ‘류’라는 인물이라고 했습니다.
아시다시피 ‘투란도트’에는 투란도트와 류라는 대조적 여성이 등장합니다. 푸치니는 대본에 따라 곡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냉철하고 강한 공주 투란도트에게는 별로 애정이 없었고, 칼라프 왕자를 짝사랑하는 노예 류를 ‘이상적 여성상’으로 창조해냈다는 겁니다. 푸치니는 류의 죽음 장면까지 써놓고는 이후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다가 세상을 떠나고, 결국 ‘투란도트’는 미완성 작품으로 남게 됐다는 거지요.
류 역시 헌신 청순 가련 비련의 여성입니다. 류가 모시는 칼라프 왕자는 투란도트 공주에게 첫눈에 반해, 공주와 결혼이냐 죽음이냐를 건 세 개의 수수께끼에 도전해 답을 맞춥니다. 그러더니 칼라프는 투란도트를 제대로 ‘정복’해 보겠다며 거꾸로 투란도트에게 ‘내 이름을 맞춰보라’며 자신의 목숨을 건 수수께끼를 냅니다. 투란도트는 류를 잡아다 ‘네 주인의 이름을 말하라’며 고문을 하게 되죠. 칼라프를 짝사랑해온 류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고 자결하면서까지, 자신의 주인을 지키려 합니다.
그러고 보면 많은 예술 작품에는 이런 헌신 청순 가련 비련형 여성들이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이상적인 여성상’은 여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중에서야 후회하는 철없는 남성들을 용서하고 끝없는 사랑으로 감싸줍니다. 과연 현실 속에도 이런 ‘이상적인 여성’들이 존재할까요? ‘철없는 남성들’은 현실에서 만나기 어렵기에 더욱 이런 여성상을 갈구하고, 비현실적이고 몽환적인 무대 위에 이상적 여성상을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저런 생각이 들어 ‘지젤’을 보다가 ‘하여간 철없는 남자들이 문제야’ 했더니, 옆에 앉았던 남자 후배 기자가 씩 웃으면서 이러더군요.
“남자들이 철이 없는 건 맞는데, 여자들은 무서워! 어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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