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행복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사람은, 꽃처럼
자신에게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할 수 없는 것입니까
화려한 색, 다양한 색, 가지가지 색동색은 회색이나 아주 평범한 회색에 비해
어떤 면에서 봐도 좋은 것입니다.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맹목적으로 낭비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순환기능이 제대로 작용하고 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먹는 것에서부터 똥을 보는 것까지의 순환기능은 자연스럽게 작용합니다.
하지만 똥을 보는 것부터 먹는 것까지의 순환은 끊겨 있습니다.
행복은 절대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로부터 오는 것도 아닙니다.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습니다.
나에게 있어 그림은 그 만남을 실현시킬 수 있는 곳, 아주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먼 곳,
우리의 입장이 허용되지 않는 곳, 그 안에 우리가 있지만 우리는 인지할 수 없는 곳,
현실 세계와는 반대되는 그런 세계와의 만남을 열어 주었던 통로입니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스스로를 분리시키는 평행한 세상입니다.
그렇습니다,
그곳이 바로 파라다이스입니다.
우리는 마법이 필요합니다.
나는 물로 컵을 채우듯,
한 작품이 마법으로 가득 찰 대까지 채우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한없이 간단하며,
한없이 아름답습니다.』
<훈데르트바서가 훈데르트바서에 관하여> 중에서
그림에 마법을 걸어 보는 사람마다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미술은 종종 우리에게 충격을 주는데, 그 충격이 생각을 확장시킨다. 하지만 이제는 왠만한 자극에 놀라지 않는다. 공포 영화 마니아들이 점점 더 큰 자극을 원하는 것과 비슷하다. 처음의 공포는 이제 더 이상 충격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평소에 보는 것들을 낯설게 만들고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은 자극적이지만 꼭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다.
아름다움을 느꼈던 미술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명한 작가의 작품은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적인 의미가 아름다움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그냥 아름다운 그림이 보고 싶을 때가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유년시절의 아른한 기억이 떠오르는, 엄마 품이 떠오르는 따뜻한 그림. 낭만을 쑥스러워하는 사람도 낭만에 빠질 때가 있다.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 1928~2000)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행복한 기분이 든다. 마치 마법을 걸어놓은 작품처럼 보는 사람을 황홀하게 만든다. 화려한 색채는 꿈속에서 만화경을 보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유대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며 나치와 2차세계대전을 겪고 강제이주 경험을 가진 작가의 그림인데 너무나 따뜻하다. 큐피트의 화살이 사랑을 불러 온다면 훈데르트바서의 그림화살은 행복을 불러온다.
훈데르트바서라는 이름부터 낭만적이다. 스스로 지은 이 이름은 ‘평화롭고 풍요로운 곳에 흐르는 백 개의 강’이라는 뜻이다. 평화의 왕국이자 파라다이스인 작품속의 세계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스스로도 자신의 세계는 식물적인 세상이라고 말한다. 파괴와 살육이 아닌 식물이다. 많은 시인들이 노래했던 나무와 강이 그의 행복한 세상이다.
단순히 그림을 예쁘게 그렸다고 행복의 마법이 걸리진 않는다. 훈데르트바서는 행복의 마법을 행동하고 만들어 나갔다. 직선보다는 상상할 수 있는 곡선과 색채로 건물을 디자인했다. 쓰레기로 보이는 소품들이 작품의 행복 속에서 다시 태어났다. 화학물감을 쓰기 보다는 흙과 천연재료로 스스로 물감을 만들었다. 작가가 건축물을 디자인하면서 선언했던 창문에 대한 권리는 행복을 표현하는 동시에 만들어 나가는 인간을 상상하게 만든다.
『창문에 대한 권리. 모든 사람은 자신의 창문 밖으로 몸을 내밀어 자신의 세 번째 피부를 재창조하고 개조할 권리가 있다. 팔이 닿는 만큼 자기 집의 창문과 외벽을 개조해 갇혀있는 이웃으로부터 자신을 구별시켜 멀리서도 모든 사람들이 ‘저 곳에는 자유로운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행복한 색채와 도안들은 작가의 실천과 일치했다. 아름다운 그림은 삶과 일치했을 때 행복이라는 마법이 걸리게 된다. 우리는 그를 환경운동가이자 예술가, 건축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훈데르트바서는 그런 직함이 필요할 것 같지 않다. 동화 속에서 뛰쳐나와 몽상을 낭만으로 바꾸는 일생을 살았다. 아름다운 환경을 꿈꾸는 모습이 예술가의 당연한 자세임을 다시 생각나게 한다. 아름답게 살 권리가 있고 그것은 부유함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실천에서 온다는 주장이다. 물질보다는 이 세상이라는 나무를 다 같이 가꾸기를 원했다.
그의 작품을 보면서 나에게 합당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경제적인 욕심 때문에 포기했던 장면들을 떠올렸다. 편리함이라는 욕심 때문에 아름다움을 포기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이 불현듯 무서워진다. 평화와 공존을 꿈꾸는 행복한 세상의 강물과 나무들이 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까. 상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낭만이라는 숙제를 안겨준다. 파라다이스는 바로 곁에 있으며 행복의 마법을 거는 것은 한없이 간단하다고.
취재협조 : 훈데르트바서 한국득별전 (예술의 전당, 문화엠엔씨)
나눔후원 : 월드비전 / 전시수익금 일부가 잠비아에 어린이행복학교를 짓는데 사용된다.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