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 프로그램을 제작할 때 가장 어려운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5년 토론제작 경험에 따르면 패널 섭외가 가장 어려운 일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지난 14일 금요일 밤에 방송된 시사토론의 주제는 '무상복지' 논쟁이었습니다. 토론 주제를 선정하는 과정에는 별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구제역 확산, 군가산점제 도입 등의 주제들도 거론되었지만, 결국 '무상복지'를 주제로 선정했습니다.
SBS 시사토론의 경우 주제 선정은 보통 화요일에 이루어집니다. 물론 상황에 따라 수요일에 결정되기 하고, 심지어는 화요일에 정한 주제가 방송 당일인 금요일에 바뀌기도 합니다. 토론 당일 주제가 바뀐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04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가 의결되던 날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도 주제를 바꿀 만하시죠.
토론 주제는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뀔 수 있지만, 주제를 결정하는 일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물론 제작자의 입장에서 보면 주제가 바뀌면 다급해지고 번거로운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제작진이 스스로 판단해서 주제를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결단의 문제일 뿐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그런데 섭외는 다릅니다. 토론 주제가 정해지면 예상되는 토론내용의 구성에 따라 패널 섭외가 시작됩니다. 패널 섭외는 잘 될 때는 일사천리로 정말 쉽게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섭외는 한번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정말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무상복지' 논쟁을 다룬 지난 주 토론이 그랬습니다. 왜 그리 섭외가 안 되는지 정말 혼났습니다.
토론 주제는 여느 때처럼 화요일 결정됐습니다. 토론 패널 구도도 자연스럽게 형성됐다. 민주당에서 무상급식, 무상의료, 무상보육 등 '무상복지 시리즈'를 당론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에, 민주당과 한나라당의 대립 구도로 패널 섭외 구도를 잡았습니다.
제작진이 처음 구상한 패널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정책위의장, 전원책 변호사 그리고 소설가 공지영 등 네 사람이었습니다. 양당 정책위의장은 당내 정책 방향을 협의ㆍ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하므로 이번 토론의 적임자라고 판단했습니다. 전원책 변호사와 작가 공지영은 라디오 방송에서 무상급식 문제를 놓고 이미 일전을 벌여 세간에 주목받고 있던 터라 토론 흥행을 위해 좋은 카드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전원책 변호사와 작가 공지영에 대한 패널 섭외가 먼저 시작됐습니다. 전 변호사는 처음에는 KBS 라디오 열린토론에 출연 선약이 잡혀 있어서 "이번만은 봐 달라"라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끈질긴 설득에 출연을 승낙했습니다. 문제는 공지영 작가였습니다. 화요일 오후 내내 휴대폰 통화를 시도했지만, 전화기가 꺼져 있습니다. 오늘은 섭외를 포기하고 내일로 미뤘습니다.
화요일 저녁 늦게 귀가 길에 민주당 전병헌 정책위의장과 통화했습니다. 전병헌 의장은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이 나온다면 일정을 조정해보겠다"고 조건부 출연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런대로 순조로운 출발입니다. 이제 한나라당 심재철 정책위의장만 섭외하면 패널 구성의 기본 틀이 잡히는 셈입니다.
수요일입니다. 오전부터 공지영 작가와 심재철 의원의 핸드폰 번호를 번갈아 가며 계속 눌러댑니다. 공지영 씨 휴대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꺼져 있습니다. 혹시 외국에 나간 건 아닐까....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해 봅니다. 심재철 의장의 핸드폰 벨 소리는 계속 울려대지만, 끝내 통화가 안 됩니다. 국회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실로 전화를 걸어봅니다. “혹시 심재철 의원님 지금 어디 계신지 알 수 있나요?” 하지만 비서관들은 의원님이 어디 계신지 모른답니다. 아무런 진전도 없이 전화만 걸다가 수요일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그래도 심재철 의원이 정책위의장으로서 당연히 출연할 거라는 기대 때문에 큰 걱정은 안 했습니다.
토론 하루 전 목요일입니다. 오전 8시부터 심재철 의장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봅니다. 어찌된 일인지 계속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왠지 불안한 생각이 듭니다. 심재철 의장 섭외가 안 되면, 민주당 전병헌 의장도 출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토론 섭외가 사실상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될 형편입니다. 다급한 마음에 국회 한나라당 정책위의장실로 다시 전화를 걸어 보좌관과 통화합니다.
"도대체 심재철 의장님 어디 계십니까?"
"오늘 아침에 청와대에 들어갔다 온다고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계속 전화해 보겠지만, 보좌관께서도 의원님과 연락되면 SBS시사토론에 전병헌 의장과 함께 출연할 수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 피드백 주시고요"
"예, 알겠습니다"
통화가 끝나자 심재철 의원 섭외가 안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리를 스칩니다. 곧바로 섭외 전략을 '투 트랙'으로 전환했습니다. 심재철 의원 섭외가 안 될 경우에 대비해 정책위의장이 아닌 다른 의원들 대상으로 섭외가 시작됐습니다.
먼저 민주당의 이인영 최고위원이 떠올랐습니다. 이인영 최고는 현역 의원은 아니지만 진보성향의 뚜렷하고, 무상복지 문제에 대한 입장이 뚜렷한 정치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차례 통화 끝에 이인영 최고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이 최고는 "자신이 토론에 출연하게 되면 한나라당에서도 최고위원이 나와 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한나라당 최고위원들은 여럿이지만, 이인영 최고와 토론하기 적합한 패널은 나경원, 정두언, 이성헌 의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세 의원 모두 일정상 토론 참석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지방에 내려가 있거나 외국에 나가 있거나 불가피한 선약이 있답니다. 일이 꼬이기 시작하니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에게 전화를 겁니다. 정책위의장을 보내 주든지 아니면 누구든 한나라당 입장을 대변할 의원을 섭외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섭니다. 하지만 도대체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핸드폰에 문자만 남겼습니다. "꼭 좀 통화 부탁한다고"
그렇다고 이대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국회로 직접 찾아가서 의원들을 섭외할까 생각하던 차에, 옆 자리에 있던 작가가 "신지호 의원은 어떠냐"고 말을 툭 건넸습니다. 그래, 신지호 의원 좋지. 민주당 이인영 최고와는 386에 나이도 비슷하고 과거에 민주화 운동도 함께 했을 텐데.... 이제는 서로 다른 이념의 소유자들로 토론 파트너로는 괜찮아 보였습니다. 바로 신지호 의원에게 전화했습니다. 통화는 단박에 이루어졌고, 신지호 의원도 토론 참석에 오케이 했습니다. 섭외가 원래 계획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목요일 오후 4시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한나라당 심재철 정책위의장실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심 의장이 토론 준비할 시간도 없고, 금요일 일정도 이미 잡혀 있는 상태여서 토론 참석이 어렵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심 "정책위의장답지 못하다"고 생각했지요. 정책위의장이라면 만사 제쳐 놓고 토론에 나와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제 입장에서 판단한 것이죠.
이제 토론 패널은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 민주당 이인영 최고위원, 전원책 변호사가 섭외된 상태입니다. 남은 과제는 이인영 최고와 통화해서 신지호 의원이 최고위원은 아니지만 토론을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는 일과 공지영씨 대신 전문가 패널 한 사람을 섭외하는 일입니다.
그런 대로 섭외가 마무리되는 듯해서 안심하고 있는데 예상 밖의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민주당 이인영 최고가 신지호 의원이랑 토론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민주당에서 최고위원이 토론에 나가는데 한나라당의 일반 의원하고는 토론할 수 없다는 것이 당의 입장이랍니다. 이인영 최고는 자기 대신 민주당의 다른 의원을 섭외해 주겠다고 합니다. 백원우 의원이나 박선숙 의원은 어떠냐고 되묻더군요. 하지만 백원우 의원과 박선숙 의원 섭외는 결국 불발에 그쳤습니다. 정말 마음은 무겁고 갑갑했지만, 이인영 최고에게는 고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와중에 민주당 쪽의 전문가 패널로는 중앙대 사회복지학과의 김연명 교수를 섭외했습니다. 김 교수는 제가 7~8년 전에 인터뷰한 적이 있습니다. 복지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내용에 대한 이해가 명확하고 대중 전달력이 뛰어난 학자입니다. 말발이 센 전원책 변호사를 상대하기에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요일 오후 6시가 넘었습니다. 민주당 이인영 최고위원이 빠진 공백을 메우지 못한 채 시간만 흐릅니다. 오래 전에 잡아 놓은 중요한 저녁약속이 있는데 갈까 말까 고민에 빠졌습니다. 일단 저녁식사는 하고 보자는 생각으로 약속 장소인 서대문으로 향했습니다. 섭외대상 민주당 의원 명단도 중얼거리며 머릿속에 입력했습니다. 토론이 당장 내일이므로 오늘 밤 늦게라도 섭외를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차를 몰고 약속 장소로 가는 도중에도 온통 섭외 생각뿐이었습니다.
저녁 7시쯤 됐을까? 운전 중에 휴대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이었습니다. "아니 오전에 문자를 남겼는데 이제야 전화야"라고 되뇌며 허탈한 듯 전화를 받았습니다. 안 대변인은 오늘 하루 종일 전화를 받을 여유조차 없었다며 전화 늦게 해서 미안하다면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한나라당에게 정신없이 바빴던 하루였나 봅니다. 민주당 이석현 의원이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의 아들이 서울대 로스쿨에 부정입학했다는 의혹을 제기한 게 바로 오늘 오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주당이 무상급식과 무상의료에 이어 무상보육까지 당론으로 채택한다고 밝힘에 따라, 한나라당도 오후 내내 의원총회를 열어 대책을 논의하느라 정신없었던 모양입니다.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이 이미 섭외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안형환 대변인에게는 사실상 할 말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토론에 정책위의장이 안 나오면 되냐"며 푸념하듯이 불만을 토로하고, 아무튼 전화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전화를 끊으려고 했는데, 안 대변인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민주당 측에서 대변인이 나오면 자신이 직접 토론에 나서겠다”는 얘기였습니다.
"좋았어~ 대변인 對 대변인"
당의 입장도 제대로 반영할 수 있고 토론 패널로는 괜찮은 구도입니다. 곧바로 민주당 이춘석 대변인에게 전화했다. 통화는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대변인은자신은 지금 지방에 내려와 있어서 토론 참석이 어렵고, 전현희 원내대변인이 보건복지위 소속이고 무상복지 문제를 잘 아니 연락해 보라고 조언해 주었습니다.
평소에도 전현희 의원을 토론에 초청해 보려고 했던 차에 잘됐습니다. SBS 시사토론은 여성의원들의 출연을 적극 환영합니다. 한나라당 나경원 의원, 조윤선 의원,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 모두가 SBS 시사토론을 통해 공중파 TV토론에 첫발을 내딛은 의원들입니다.
전현희 의원은 제 전화를 받고 흔쾌히 토론에 응해 주었습니다. 마치 토론을 준비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토론 섭외가 마무리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밤 9시가 다 됐군요. 정말 기분 좋은 밤입니다. 사막을 헤매다 오아시스를 만났을 때 바로 이런 기분이 아닐까요?
마지막 과제가 하나 남았습니다. 이미 섭외해 놓은 한나라당 신지호 의원에게 연락해서 이번 토론에 모시지 못하게 되서 미안하다고 양해를 구하는 일입니다. 패널을 섭외했다가 번복할 때 제작자는 정말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하지만 제작자로서의 숙명이라 생각합니다.
섭외란 이렇습니다. 잘 될 때는 잘 되지만, 안 될 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섭외는 타인과 공감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작자의 의지대로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섭외할 때는 섭외대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 말입니다.
1월 14일(금) SBS 시사토론은 올해 들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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