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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포터] '황해'는 누구의 바다인가

영화 '황해'가 대중의 관심을 끄는 이유는 분명하다. 2008년 대한민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화 '추격자'의 감독이 찍고, 같은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황해'는 그 사실만으로도 관객들을 모으지만 동시에 큰 부담을 안고 가야만 한다. '추격자'와의 비교는 숙명이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황해'는 '추격자'와 달라 보인다. 비록 같은 배우들이 출연하고 있지만, 그 내용도, 규모도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특히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서울 골목의 '추격자'와 중국 지린 성과 한국을 오가는 '황해'의 배경은 두 영화의 가장 큰 차이로 지목되는데, 영화 '추격자'가 대도시라는 공간의 익명성을 주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임을 상기한다면 두 영화의 다른 배경이 다른 내용을 잉태했으리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영화 '황해'를 보는 내내 감독의 전작 '추격자'를 연상하던 나.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는 두 영화를 연결하려 하는가? 단순히 같은 감독과 배우, 그리고 그 어두운 분위기 때문인가? 아님 두 영화를 관통하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일까?

결국, 궁금증은 영화 말미 그 무수한 살인의 이유가 밝혀지면서 동시에 풀렸다. 영화는 조폭 우두머리이자 버스회사 사장 김태원이 죽어가면서 중얼거리던 "그놈이 내 여자를 건드렸어."라는 대사를 통해 영화 내내 보여주었던 그 피칠 갑의 원인이 결국 치정이었음을 보여주는데, 그 장면에서 영화 '황해'와 '추격자'를 관통하는 그 무엇을 찾은 것이다.

중산층 부부의 불륜과 질투가 불러일으킨 그 수많은 살인. 결국 '황해'의 난무하는 피들을 보며 '추격자'를 떠올린 건 그 살인의 어처구니없는 원인 때문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저질러진 '추격자'의 살인과 '황해'의 그 죽음은 본질적으로 같다. 비록 '황해'는 ‘치정’이라는 이유를 내밀고 있지만, 그것이 그 많은 죽음을 합리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욕망의 몸짓을 보여주는 면가의 폭력성

결국, 두 영화는 살인을 일으키는 우리 사회의 광기를 이야기한다. 익명성이 극단적으로 달하는 대도시에서 동기 없이 살인을 벌이는 '추격자'의 사이코패스와, 나의 욕심을 위해 다른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중산층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개인의 욕망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이 시대의 병리 현상이며, 지금 이 시간에도 벌어지고 있는 사건 사고들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영화 '황해'는 스크린에 피를 과도하게 사용하여 살인을 희화화시켰다. 그로 인해 잔인함을 희석하지만, 반대로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인 살인의 원인을 등장시킴으로써 그 죽음의 섬뜩함을 증폭시킨다. 혹자는 '황해'가 그 살인들의 원인으로 '치정'이 아닌 '사회적 의제'를 택했더라면 더 큰 반향을 일으켰으리라고 평하지만, '황해'는 지극히 개인적인 치정을 숱한 죽음의 원인으로 택함으로써 현재 우리 사회를 더 아프게 꼬집는 것이다.

그들의 바다 '황해'

영화의 제목 '황해'는 감독과 배우 이름 말고도 발걸음을 극장으로 이끈 또 하나의 요소였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 '황해'. 학창 시절 서해의 다른 이름으로 배운 '황해'를 감독은 왜 소환시켰을까? 한반도 서쪽의 바다를 서해가 아닌 황해라 명명한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는 조선족의 이야기를 다루었던데, 황해와 조선족은 어떤 관계를 지니는 걸까?


  ▲ 목숨을 건 거래

전작 '추격자'에서도 그랬듯이 감독은 '황해'에서도 이 미쳐버린 시대의 가장 큰 피해자가 누구인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추격자'에서는 사회의 무관심 속에 살인의 위협에 방치된 '보도방 출장안마사'를 통해 이 시대의 피해 계급을 다루었다면, '황해'에서는 빚에 쪼들려 청부살인을 해서라도 돈을 벌려고 한국에 온 구남을 통해 이 사회에 하층계급으로서 조선족을 그려낸다.

같은 동족으로서 코리안 드림을 가지고 한국으로 숨어 들어온 조선족들. 그러나 그들에게 펼쳐지는 건 악몽 같은 현실이다. 한국인 대신 3D 직종에 종사하고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전혀 대접을 받지 못하며, 사회적 차별 속에서 한국의 야만적인 모습을 매일 대면하고 살아야 하는 그들.

영화 첫머리에 등장하는 " 병에 걸린 개는 제일 먼저 제 어미를 물었고 이후 아가리로 물 수 있는 건 모조리 물어 죽였다. 며칠 뒤 삐쩍 마른 꼴로 나타난 그 개는 천천히 드러누워 죽었고, 개를 묻어줬다. 어른들은 그날 밤 묻힌 개를 꺼내 잡아먹었다. 다시 개뱅이 돌고 있다."라는 구남의 독백이 깔린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 내용을 떠나서 관객들은 강한 조선족 억양 탓에 구남의 말을 쉽사리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것은 결국 조선족의 현재를 보여준다. 한국어가 아닌 조선족 어를 구사하는 만큼 우리와 다른 그들. 우리는 그들을 말로만 같은 민족이라고 하지만 현실 사회에서 그들은 우리와 엄연히 다른 타자로서, 게다가 우리보다 훨씬 못한 사람들로 차별당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영화 제목 '황해'는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중국의 동해도 아니요, 한국의 서해도 아니다. 그곳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바다를 건너야 했던 이들의 애환이 서린 공간일 뿐이다. 그 이름만큼 뿌연 황해. 얼마나 많은 조선족이 그곳을 건너면서 바다처럼 뿌연 자신의 앞날을 두려워했을까.

영화는 현재 동아시아의 자본주의 시스템이 얼마나 잔인하리만큼 조선족을 착취하고 있는지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구남은 자신에게 청부살인을 의뢰한 사람을 끝까지 추적한 결과 그 의뢰인이 살해된 교수의 아내와 바람난 일개 은행 과장임을 알아내는데, 결국 이는 현재 우리 사회와 조선족 사회가 어떻게 얽혀 있는가를 의미한다.

요컨대, 남한의 중산층이 술자리에서 자신의 욕망을 읊조리고 나면 그것이 증폭에 증폭되어 조선족에게는 목숨을 담보로 한 거래로 내려지는 것이 작금의 시스템인 것이다. 물론 극적 상상력이겠지만 영화의 그러한 설정이 섬뜩하게만 느껴지는 건 자본주의란 시스템 속에서 이는 충분히 개연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중심부가 끊임없이 주변부를 착취하고 수탈하는 근대 자본주의 시스템.

영화 속 구남은 끝끝내 다시 황해를 건너지 못한 채 수장되고 만다. 그와 함께 했던 일확천금의 욕망도, 아내를 되찾겠다는 소소한 바람도. 결국, 황해는 욕망으로 점철된, 광기 어린 이 사회가 희생양으로 삼은 존재들의 유일한 안식처이자 무덤인 것이다.

영화 '황해'는 잔인하고 매우 폭력적이다. 그러나 이 영화를 한 번쯤 볼만한 이유는 현실은 그보다 더 하기 때문이다.

이희동 SBS U포터 http://ublog.sbs.co.kr/rcn60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에도 송고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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