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인사가 나면서 오랜만에 다시 공연 분야를 맡게 됐다. 미술 분야를 취재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출입처가 또 바뀐 것이다. 이전에 공연 담당하던 후배가 이번 인사로 다른 부서로 나가면서, 다시 공연을 맡게 되었다. "방송국은 왜 이렇게 출입처가 자주 바뀌어요?" 하는 미술계 인사들에게 "저는 오래 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세요"하고 다니다가 바뀐 거라 조금은 아쉽고 민망하기도 하다. 하지만 오랫동안 공연 취재하면서 모르는 사이에 내게 '공연 전문'이라는 꼬리표가 붙었다는 사실은 확인했다.
공연을 다시 맡게 된다고 하니 반겨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감사하다. 3년 반 만에 친숙한 동네로 돌아오게 된 것이니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그 동안 이 동네가 얼마나 바뀌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그런데 화요일에 3년 반 만에 처음으로 공연 프레스콜을 취재하러 갔다가 '변화'를 절감했다.
이 날 취재한 공연은 연극 '이기동 체육관'이다. 2009년 대학로 소극장에서 초연됐던 작품이라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다. 공연 장소는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 '이기동 체육관'은 권투가 소재다. 왕년의 권투선수 이기동이 운영하는 쇠락한 권투 도장을 배경으로 소시민들의 꿈과 사랑, 좌절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물론 엄연히 다른 작품이지만, 과거의 인기종목을 소재로 했고, 삶에 찌든 소시민들의 희로애락을 그렸다는 점에서 영화 '반칙왕'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각색과 연출을 맡은 손효원은 권투 선수가 권투를 소재로 삼은 이유를 묻는 내 질문에 "권투는 한 때 국민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주 종목이었지만, 지금은 한물간 상태이고, 많은 이들로부터 잊혀졌다"며, "이런 권투가 어찌 보면 '우리 이야기'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통한다"고 말했다. 링에서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것처럼, 평범한 사람들도 새로운 에너지를 통해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권투라는 소재를 통해 보여주려 했다는 것이다.
작명을 '이기동'으로 한 이유도 있었다. 이 작품의 대본을 써놓은 뒤에도 제목은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연출가가 개인적으로 다니던 권투 도장의 관장 이름이 '이기동'이었단다. 여기에 영감을 받아 '이기동 체육관'이라는 제목을 정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이기동은 왕년의 인기코미디언 이름으로, 향수를 자아내는 이름이기도 하니까.
'이기동 체육관'은 권투를 통해 다시 희망을 찾는다는, 충분히 예측 가능한, 어찌 보면 진부하기까지 한 줄거리다. 긴장감이 떨어지고 캐릭터 구축이 평면적이어서 아쉬웠지만, 공감을 이끌어내는 대목도 꽤 있었다. 나 자신이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라서 그런지 가족간의 애증이 표현된 장면에 눈길이 갔고, 혹독한 훈련을 거쳤을 배우들의 권투 연기가 정직하고 생생했다.
'이기동 체육관'에는 유명 배우인 김수로도 출연했다. 김수로는 이 작품이 대학로에서 공연됐을 때 보고 작품에 매료돼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김수로는 "잘 차려진 밥상에 숟가락을 얹은 격"이라며 이 작품에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며, 작품에 참여하면서 행복하다고 했다. 김수로가 맡은 역은 관장과 이름이 같은 이기동이라는 청년이다. 이 역은 어린 시절 이기동 선수를 영웅으로 여겼다가 다시 만난 이기동 선수가 몸도 마음도 쇠약해진 것을 보고 안타까워하며, 그에게 다시 일어날 계기를 제공하는 인물이다. 솔비도 출연한다. 권투를 통해 변화하는 문제아 역을 맡았다.
김수로가 맡은 이기동 역은 극의 내용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하는 역이다. 하지만 등장하는 장면이 그리 많지는 않고, 캐릭터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실제로 보면 그리 비중이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솔비가 맡은 역도 그렇다. 하지만 이 연극은 지금 김수로와 솔비의 출연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홍보도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홍보 담당자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프레스 콜에 굉장히 많은 기자들이 온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공연 담당하는 문화부 기자보다는 연예부 기자들이 훨씬 많이 온 것 같았다.
기자 간담회에서 질문은 김수로와 솔비에게 집중됐다. 작품에 대한 질문보다는 연예인 개인에 대한 질문이 주를 이뤘다. 김수로에게 "권투 연습을 많이 해서 몸매가 좋아졌을 텐데, 다음 번에는 상반신 탈의를 할 생각이 없느냐"는 질문이 던져지고, 김수로가 대답하면서 "사실 제가 상반신 탈의를 ‘반칙왕’에서부터 했으니까 상반신 탈의 1호예요"라고 하는 식이었다. 다른 배우들에게는 거의 질문이 돌아가지 않아서 약간 민망했는데, 다음 취재 때문에 기자간담회를 끝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이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는 않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스타에게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력이 안 되는데도 무조건 유명세 때문에 스타를 기용한다면 문제겠지만, 적절한 스타 캐스팅은 대중의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공연의 활력소가 될 수 있다. 나는 이 공연을 소개한 기사에 김수로와 솔비가 출연한 것을 언급하고 김수로의 인터뷰를 썼다. 화제가 될 만한 '팩트'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타 캐스팅은 사실 오래 전부터 심심치 않게 이뤄져 왔으니,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예전과 비교해 달라진 점이라면, 예전에는 지금처럼 연예 뉴스를 다루는 매체가 많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취재 현장에서 공연계 취재 풍토의 변화를 실감했다. 예전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스타를 쫓아다니며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연예 뉴스의 공급이 정말 폭발적으로 많아졌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다. 기자간담회 도중에도 수많은 연예 기자들이 인터넷으로 사진과 기사를 송고하고 있었다.
수요 없는 공급이 어디 있으랴. 연예 뉴스 공급이 늘어난 것은 그만큼 수요도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스타와 관련한 뉴스를 궁금해 한다. 연예 뉴스는 대중의 관심이 높은 뉴스다. '이기동 체육관' 공연도 김수로와 솔비의 출연으로 연예 기사의 소재가 되면서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고 있다. 그러니 연예뉴스 자체가 나쁘다는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연예 뉴스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문제다. 연예 뉴스를 다루는 매체가 지나치게 많아지다 보면 경쟁이 심화되고, 따라서 자극적인 제목으로 관심을 끌려는 기사도 더 많아진다. 본질과는 관련 없는 선정적인 기사들이 양산될 위험이 크다. 게다가 요즘은 이런 연예 뉴스 경쟁이 '대중이 원한다'는 전제 아래, 매체를 가리지 않고 치열해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공연 자체를 다룬 기사보다, 사실상 공연에 출연한 연예인 동정기사에 가까운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 상황이 달갑지는 않다. 별 내용 없이 연예인 말 한 마디를 제목으로 삼고, 연예인 사진 한 장 달랑 박아 넣은 기사들이 넘쳐나는 상황이 불편하다. 설사 이게 시대의 흐름이고, 대중이 원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내가 구식 공연 기자라 해도 할 수 없다. 3년 반 만에 찾은 공연 취재 현장이었건만 마냥 기쁘거나 설레지 않았던 것은 아마 이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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