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 사람들은 입법, 사법, 행정부의 수장을 일컫는 '3부 요인'이라는 말을 싫어합니다. 최고법인 헌법을 다루는 기관이기 때문에 이들과 위상이 같다며 우스갯소리로 '4부 요인'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헌법재판소가 최근 대법원에 단단히 뿔이 났습니다. 유신헌법 시대의 대통령 긴급조치 1호에 대해 대법원이 내린 위헌 판결 때문인데요, (정확하게는 위헌 판결이 아닙니다만, 편의상 이렇게 부르겠습니다) 법률이 헌법에 어긋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권한이기 때문에 대법원은 사실상 월권을 했다는 게 그 이유입니다.
우리가 흔히 '법'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서열이 있습니다. 헌법 - 법률 - 명령 - 조례 - 규칙 순인데요. '대통령 긴급조치'라는 건 이 가운데 어디에 해당하는지는 명문화된 규정이 없지만, 현행 헌법에서 '대통령 긴급 재정경제조치와 명령'은 법률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고 규정한 점을 근거로 헌법학자들은 긴급조치도 법률의 효력을 갖는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대법원은 권한 밖의 일을 한 것일까요. 물론 대법원도 논리가 있습니다. 긴급조치는 국회의 의결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법률이 아니고, 따라서 긴급조치가 위헌인지를 따지는 것은 헌재가 아닌 대법원의 권한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히 헌법재판소는 이런 논리를 납득할 수 없다고 하고 있는데, 나아가 앞으로 관련 사건을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우려도 함께 내놓습니다. 이번에 대법원의 재심으로 구제받은 피해자 오종상 씨는 헌법재판소에도 유신헌법 조항과 긴급조치 1호에 대한 헌법소원을 낸 상태였는데요, 만일 헌법재판소가 긴급조치를 '법률'이라고 보게 되면 앞서 말한 대법원의 판결과는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게 된다는 겁니다.
이런 법률가들의 논리 싸움 말고도, 헌법재판소의 경우에는 한 사건에서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오면 다른 피해자들은 법원에 재심을 신청하면 자동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반면 (최근 혼인빙자 간음죄 위헌 판결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법원에서 긴급조치 사건을 도맡아 하게 될 경우 피해자들은 재심을 통해서 구제받아야 하는데, 이 경우에는 수사기관의 '명백한 증거조작'이 있어야 재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긴급조치 위반으로 단순한 처벌을 받은 사람은 구제받을 수 없다는 걱정도 나옵니다.
막걸리 한 잔 걸치고 정부를 조금만 비판해도 처벌받는다 해서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웃지못할 별명이 붙은 대통령 긴급조치에 대해 36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온 건 늦은 감은 있어도 우리나라 사법역사에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할 겁니다. 하지만 취재를 하면서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해묵은 갈등이 이 사건에도 녹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마치 누가 공을 먼저 차지할 것인지를 두고 아웅다웅하는 것 같아보이기 때문이지요.
이미 공은 대법원이 차지했습니다. 언론, 특히 방송사의 입장에서 다음에 헌법재판소에서 '진짜' 위헌 판결이 나온다한들 비중있게 다루지는 않을 겁니다. 한 번 나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새로운 소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기자들은 이번에 대법원장이 판결 선고하는 장면을 화면에 담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공교롭게도 헌법재판소는 대법원에서 이 판결을 선고한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합니다. 형식논리와 자구에 목매는 법조계에서는, 이렇게 과거사를 바로잡을 '권한'도 중요한가 봅니다.
대법원 판결에 헌법재판소가 '뿔 난' 이유
과거사를 바로잡을 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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