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여름 서울 강북 지역의 한 화재 현장에서 2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됐다.
해당 여성은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이 사건은 당시 김수철 사건, 동대문 아동 성폭행사건 등이 잇따라 터져 세간의 주목을 끌지는 못했다.
하지만 사건 발생 140여일이 지난 현재까지 경찰은 이렇다 할 실마리조차 잡지 못하고 있어 지역 주민이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다.
◇홀어머니 출근한 새벽에 변 당한 20대 여성 = 7월26일 오전 7시14분께 서울 강북구 수유동의 한 다세대주택 3층 화재현장에서 이모(24·여)씨의 시신이 발견됐다.
이씨는 자신과 단둘이 사는 어머니 박모(56.청소원)씨가 당일 새벽 4시께 일을 하러 나간 뒤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경찰은 이씨의 하의가 벗겨졌고 목이 졸린 흔적이 있는 점 등으로 미뤄 범인이 이씨를 성폭행한 뒤 살해하고서 범행을 은폐하고자 방화했을 개연성이 큰 것으로 보고 수사에 착수했다.
집안에서 사라진 물건도 없고 이씨가 반항한 흔적도 발견되지 않아 수사 초기 경찰은 미모를 가진 피해자와 치정관계에 있는 면식범의 소행일 개연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현장이 화기(火氣) 때문에 훼손돼 지문이나 머리카락 등 결정적 단서는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 이씨 시신을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시신에 남아있던 정액에서 한 남성의 DNA를 확보하자 경찰은 조만간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기대감에 부풀었다.
비슷한 시기에 서울 중랑구 면목동 일대에서 연쇄적으로 성폭행·강도사건을 저지른 '면목동 발바리'가 경찰의 저인망식 DNA 채취에 압박을 느껴 수사 초기에 자수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남자친구와 직장동료 등 주변 사람은 물론 사건 현장 인근에 혼자 사는 젊은 남자들을 모두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이들을 찾아다니며 전방위적으로 DNA를 수집해 분석하는 작업에 나섰다.
하지만 1천명에 달하는 DNA를 분석했는데도 유전정보가 일치하는 용의자는 떠오르지 않았다.
경찰은 이씨 집 부근에 설치된 방범용 CCTV는 물론 편의점 등에 설치된 사설 CCTV까지 모두 확보해 수없이 분석했지만 4방향을 6초에 한번씩 바꿔가며 거리를 비추는 방범용 CCTV에는 이씨 집 현관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포착되질 않았다.
화면에 잡힌 사람들도 인상착의가 뚜렷하게 식별되지 않아 경찰을 실망케 했다.
경찰은 이씨가 인터넷 게임 'WOW'를 즐겨 했다는 점에 착안해 컴퓨터 기록을 확보, 최근에 대화를 나눈 주변 남성들까지 모두 조사해봤지만 이렇다 할 혐의점을 포착하지 못했다.
◇"불안해서 이사할 결심 굳혔어요" = 이처럼 수사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자 시민들은 인터넷에 범인 검거를 재촉하는 글을 올리며 치안서비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다.
권모씨는 서울강북경찰서 홈페이지에 "같은 시기에 발생한 여약사 살해 사건의 피의자 둘은 벌써 재판이 진행 중인데 방화살해 사건은 아직 용의자조차 파악 못 했는지 감감무소식"이라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수유6동에 산다는 주모씨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해가 진 뒤 동네 골목에서 순찰차를 보는 일이 하루 한번 정도다. 주민이 믿고 의지할 곳이 경찰 말고 어디 있겠느냐"며 불안함을 나타냈다.
문모씨는 강북구청 홈페이지에 "주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 동네 으슥한 골목에는 지금도 불량 청소년이 우글대는데 위험한 일이 벌어져도 경찰이 바로 처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며 치안 서비스에 불신을 드러냈다.
젊은 여대생과 직장인은 여전히 '밤길이 무서워 혼자 다니기 어렵다'고 불안해 한다. 범인 검거가 늦어지자 치안이 불안하다며 아예 다른 곳으로 이사하겠다는 주민도 등장하고 있다.
수유동 인근에 사는 대학생 이예진(20.여)씨는 "살인사건 이후 지금까지 친구 만나러 저녁에 나가는 것도 부모님이 잘 허락해주질 않는다. 요새는 과학수사가 발달했다는데 아직도 범인을 못 잡는 이유가 뭔지 궁금하다"고 했다.
몇개월 전 수유동에 이사왔다는 한 20대 여성 직장인은 "이 근방에서 한 여자가 강간·살해당했다는 기사를 보고 불안해서 이사할 결심을 굳혔다"며 한 인터넷 포털에 치안이 좋은 지역이 어딘지를 묻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제2 살인의 추억' 만들 순 없다 = 경찰이 사건 발생 140여일이 지난 현재까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해 이 사건은 올해 서울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중 유일한 미제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커졌다.
여전히 전담팀을 운영하는 경찰은 수사 초기에 간과한 부분을 복기하면서 현장 주변 주택가와 주유소, PC방 등지에서 탐문을 계속하는 한편 과거에 수유동에 살았던 전과자를 상대로 DNA 채취를 계속하고 있다.
경찰은 별다른 증거도 목격자도 없어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이씨 몸 안에 남아있던 한 남성의 정액에서 확보한 '확실한 증거'인 DNA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있다.
지난 7∼9월 강북지역에서 저인망식 DNA 수사를 펼친 결과 수년 전에 발생했던 성폭력 범죄 8건의 범인들도 잡아낸 만큼 언젠가는 방화살인 사건의 범인도 잡힐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 경찰 관계자는 "아직 용의자도 특정하지 못했을 만큼 단서가 없고 어려운 사건"이라며 "범인으로 유력한 남성의 유전자 정보를 확보해놓은 만큼 하루빨리 검거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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