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UST(욕정). 평창동 화정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이름입니다. 한중일 세 나라의 '춘화(春畵)'를 여러 점 비교해 볼 수 있는 전시회지요. 사실 이 전시회를 취재해 기사를 쓴 것이 추석 즈음이었으니까 시일이 지나긴 했습니다만, 그 동안 후기를 써야겠다 생각만 하고 미뤄왔어요. 그런데 얼마 전 이 전시회를 다녀왔다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더 늦기 전에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춘화'는 남녀의 성애를 소재로 한 그림을 말합니다. 사실 내놓고 보기에는 좀 쑥스러운 그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즐겨온 '대중적'인 그림이기도 합니다. 영화 '음란서생'도 있었고,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보니까 점잖은 유생 이선준도 구용하가 건네준 '빨간 그림책'을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들쳐보는 장면이 나오더군요.
춘화는 미술사적으로는 당대의 풍습과 문화를 짐작하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기도 합니다. 화정박물관의 이번 전시는 춘화를 미술사적으로 접근한 최초의 전시라고 하는데요, 담당 큐레이터는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남우세스럽게 뭘 이런 걸 전시하나?'하는 얘기를 들을까 봐 걱정도 많았다고 하네요. 직접 가보니 아주 흥미로운 전시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특히 한중일 세 나라의 문화 차이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일단 한국의 춘화부터 살펴보지요. 춘화는 풍속화가들이 많이 그렸다고 하는데요, 큐레이터 말에 의하면 개인 소장가들이 갖고 있는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알려진 것이 많지는 않다고 합니다. 이번 전시회에도 전시품이 별로 많지는 않습니다만, 신윤복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사시장춘'(맨 위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제공)은 단연 눈길을 끕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작품을 빌려와 전시합니다.
방문이 닫혀 있고, 앞에 신발 두 켤레가 '약간 흐트러진 채' 놓여있습니다. 술상을 들고 온 여자아이가 밖에서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줄기 한 자락 흘러내리는 산이 배경으로 그려져 있고요. 남녀의 사랑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남녀'가 보이지도 않고요. 하지만 은근하게 상황을 일러주는 화가의 솜씨가 탁월하지 않습니까.
다음은 중국입니다. 청대에 제작된 춘궁화첩을 중심으로 전시되고 있는데요, 중국의 춘화는 발을 소재로 한 경우가 많습니다. 중국에서 전족을 한 여인의 발은 아주 은밀한 부위로 여겨졌다고 합니다. 여인이 맨발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도, 남이 자신의 발을 만지게 하는 것도, 성적인 의미를 가진 행위였다고 하지요. 여인의 발을 만지는 장면, 발을 씻겨주는 장면이 춘화에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성애의 은유적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훔쳐보기'를 주제로 한 그림들도 여럿 있습니다. 젊은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창 밖에서 훔쳐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표정이 익살스럽게 묘사된 그림을 보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뿐 아니라 생활용품이나 장식품들도 있습니다. 전족 모양의 술잔도 사용됐고,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모습을 과일 모양의 그릇 안에 만들어 넣은 '압상저' 같은 물건들은 어머니가 딸을 시집 보낼 때 혼수품이었다고 하네요. '성교육용'이었던 셈이죠. 한쪽 면은 점잖은 그림, 한쪽 면은 야한 그림을 그려놓은 부채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일본으로 가보지요. 일본의 춘화는 '우키요에'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려낸 풍속화를 '우키요에'(浮世繪)라고 하는데요, '우키요에'의 주종은 여러 가지 색상으로 찍힌 목판화입니다. 우키요에는 사실 19세기 유럽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1851년 런던에서 우키요에 전시회가 열렸고, 1865년 프랑스 화가 브라크몽이 우키요에 화가 호쿠사이의 그림을 친구들과 돌려본 것이 고흐,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같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고 합니다.
우키요에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은 평면적이고 강렬한 색을 사용하며, 대담하게 검은색을 사용해서 강한 대비를 나타내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고흐의 '탕기 할아버지', 모네의 '에밀 졸라의 초상'은 작품 배경에 우키요에가 그려진 것으로 유명하지요. 또 드뷔시는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앞바다 파도 뒤'라는 작품(바로 위 그림. 친숙한 그림이지요?)을 보고 자극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했다고 하니까, 클래식 음악에도 영향을 준 셈이네요.
인상파에 큰 영향을 준 호쿠사이를 비롯해 에도 시대 일본 화가를 이끈 유명 화가들은 춘화도 많이 그렸습니다. 일본의 춘화는 대담한 묘사와 과장된 표현이 특징이고, 이야기가 곁들여진 것들이 많습니다.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발휘된 이야기와 그림들이 눈길을 끄는데요, 한국이나 중국 춘화의 상당수가 작가 미상인 데 비해, 일본 춘화들은 작가가 알려진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습니다.
대량 생산이 가능한 목판화 삽화를 곁들인 야한 그림책 '염본'은 일반에 큰 인기를 끌어 대여소가 성업했고, 막부가 금지령을 내렸을 때에는 화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교묘하게 비튼 가명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여러 사람이 빌려봐서 책장에 손때가 묻어있기도 하고, '빌린 책을 손상하면 얼마를 배상하시오' 이런 문구들이 적혀 있기도 해서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이 전시회를 취재하고 나서 쓴 기사는 8시 뉴스 전파를 탔는데요, 사실 화면 편집이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방송 뉴스에서 보여줄 수 있는 화면 수위가 어디까지인지 고민을 해야 했으니까요. 저는 이 전시회가 미술사적으로 의미있는 전시회라고 생각해 취재한 거지만, 혹시나 '선정적인 기사로 손님 끌려 했다'는 얘기를 들을까 걱정스러워 화면은 오히려 더 보수적으로 편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몇몇 후배들한테는 "'춘화'라고 하더니 화면은 '추화' 던데요"라는 불평 아닌 불평을 듣기도 했지만, 불특정 다수가 시청하는 TV 뉴스의 특성상 이는 불가피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전 아직도 이 전시회 취재의 '후유증'을 겪고 있어요. 저나 카메라기자인 공진구 씨나, 이후 다른 미술 전시회에 가서도, 서양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누드조차 보여주는 데 아주 조심스러워하게 됐거든요. 국립현대미술관이 주최한 '피카소와 모던아트' 전을 취재할 때, 야한 느낌이라고는 거의 없는, 독일 표현주의 작가인 키르히너의 누드그림을 보고도 '이걸 보여줘도 되나 안 되나'를 놓고 토론했을 정도니까요. 자라에 놀란 가슴 솥뚜껑에도 놀란 셈이랄까요.^^
이 전시회는 본래 12월 19일까지 열릴 예정이었지만, 반응이 좋아 전시 기간을 좀 더 연장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전시회로서는 드물게 '미성년자 관람 불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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