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 번 취재파일에 거론한 바 있습니다만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검찰 수사는 저에게 가위 '충격'이었습니다. 검찰이 마음 먹으면 얼마나 무섭게 수사할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였습니다.
한 전 총리의 5만 달러 뇌물 수수 혐의 재판이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검찰은 말 그대로 총력체제에 들어갔습니다. 대검 중수부까지 인력과 수사 지원을 하며 한 전 총리의 과거사를 말 그대로 먼지 한 톨까지 털었습니다. '한 전 총리가 곽영욱 사장의 제주도 골프장 콘도를 공짜로 빌린 일', '한 전 총리 가족의 해외 여행 상황', '한 전 총리 자녀의 유학 생활' 등이 검찰에 의해 낱낱이 까발려졌습니다.
역시 압권은 한 전 총리가 지역구內 건설업자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를 확인한 대목입니다. 기존의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로만으로는 수사의 성과가 나오지 않자 특수1부까지 투입해 기어이 '얘기되는' 혐의를 찾아냈습니다.
아직 재판중인 만큼 그 혐의의 사실 여부를 확정지어 말할 수 없습니다만…. 어떻든 수사를 옆에서 지켜보던 기자도 '검찰이 내 과거 행적에 대해 죄를 묻겠다고 나서면 나조차 기억 못하는 죄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생각에 무섭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검찰의 추상 같은 풍모에 비해 민간인 불법사찰의 청와대 개입 의혹을 수사하면서 보여주는 모습은 완전히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같은 서울중앙지검에서 수행한 수사인데도 전자는 어떤 적도 베어버리겠다는 '천하제일검'의 현란한 칼춤 같았다면 후자는 행여 불량배라도 만날까 큰 소리로 자신이 가고 있음을 알리는 야경꾼의 딱딱이와 같다고 할까요.
한 번 검찰이 확보한 민간인 불법사찰에 청와대가 개입한 것으로 의심되는 정황을 따져볼까요.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자체 MT에 청와대 이영호 노동고용비서관이 참석했습니다. 자신과 업무상 아무 관련이 없는 조직의 내부 행사에 몇몇 인사들과 친분이 있어 참석했다는 이 전 비서관의 설명이 납득이 되시나요? 아울러 이 비서관은 윤리지원관실 직원들이 총리에게 신고하는 장소에도 나타났다고 합니다. 특별한 관계가 의심되지 않습니까?
남경필 사찰을 했던 지원관실 직원은 관련 지시를 받으면서 청와대 하명 사건이라는 얘기를 들었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 또다른 직원은 지시사항을 기록한 노트에 BH, 즉 청와대의 이니셜을 적어놨습니다. 총리실 컴퓨터 하드디스크를 어렵게 복원한 결과 청와대 보고 목록이 버젓이 나왔습니다. 총리실이 청와대에 일상적으로 보고했음을 미뤄 짐작케 하는 정황입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제시된 증거는 대포폰 내지 차명폰입니다. 청와대의 최 모 행정관이 남의 이름을 빌려 휴대전화를 개통한 직후 증거인멸에 나선 총리실 직원인 장모 주무관에게 이 휴대전화를 빌려줬습니다. 장 주무관은 이 휴대전화를 이용해 증거를 인멸해줄 컴퓨터 전문업체와 접촉했고 실제 컴퓨터에 파일 형태로 보관중이던 각종 증거자료들을 디가우징, 즉 강한 자력으로 컴퓨터 기억장치를 완전히 못쓰게 만드는 방식으로 인멸해버렸습니다.
하필 증거인멸에 쓸 휴대전화를 청와대 직원, 그것도 앞서 개입 의혹이 제기됐던 이영호 비서관의 직속 부하 직원에게 빌리다니 우연치고는 너무 공교롭지 않습니까? 누가 봐도 청와대가 총리실의 증거 인멸을 지원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정황에도 불구하고 검찰은 불법사찰 과정의 청와대 개입 의혹에 대해 무혐의 결정을 내렸습니다. '죄를 물을만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는 설명입니다. 사실 위에 열거한 정황들은 비전문가인 제가 보더라도 범죄의 혐의점을 의심할 만한 내용들이기는 하지만 실제 기소를 할 수 있을 만큼 명확한 물증이라고는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수사의 단서는 될만하고 이런 정황들을 근거로 더 깊히, 샅샅이 확인해볼 이유로는 충분합니다. 앞서 예로 들었던 한명숙 전 총리에 대한 수사 정도로만 공을 들이고 애를 썼다면 적어도 국민들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상황들에 대해 속시원한 설명이라도 내놓을 수 있지 않았을까요.
얼마 전 검찰의 한 고위 간부와 작금의 사태에 대해서 방담을 나누면서 이런 불만을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검찰이 있는 죄를 덮고, 없는 죄를 만든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다만 언제, 어느 사건에나 똑같은 잣대를 들이대고 있는지는 의구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어떤 사건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와 태도를 보이고 또다른 사건에는 매우 무른 기준과 허술한 자세를 보여준다. 그러니 국민이 검찰에 대해 의심하고 오해하는 것 아니겠나."
여러가지 검찰 비판에 대해 강한 어조로 반박하던 그 간부도 이런 지적에는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검찰이 가장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부분이라고요.
검찰을 구성하는 수많은 검사와 직원들 사이에 가치관이나 능력에 어느정도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겠죠. 따라서 수사 주체에 따라 수사 결과에 약간의 차이야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한결같이 권력과 가까이 있는 집단이나 사람에 대해서는 잣대가 쪼그라들고 그 반대에 위치하거나 힘이 없는 부류에는 잣대가 길어진다면 국민들이 검찰의 공정성에 수긍할 수 있겠습니까? 검찰의 잣대가 제멋대로 늘었다, 줄었다 하는 여의봉이라면 어떻게 우리 사회정의를 보호해달라고 믿고 맡길 수 있겠습니까?
열심히 수사해 결과를 내놓으면 언론이 마냥 이를 왜곡한다고 탓할 것이 아니라 내 잣대가 혹시 여의봉이 아니었나 돌아보기를 검찰에 간곡히 촉구합니다.
검찰의 잣대는 여의봉? '늘었다, 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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