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다프 전시회 취재 1주일 후, 제임스 파우더리(James Powderly) 교수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이라이터 개발 주역 중 한 명이며 현재 홍익대 미대에서 시각디자인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화성 탐사 로봇을 만드는 데 참여한 나사의 엔지니어 출신이며,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미디어 아티스트 그룹 '그래피티 리서치 랩'의 공동 창립자이기도 합니다.
'그래피티'는 그에게 단순한 낙서라기보다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도구 같은 것입니다. 그래피티 리서치 랩은 이 '그래피티'에 기술을 결합시켰습니다. 리서치 랩은 레이저 포인터로 건물에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쓰는 시스템을 개발해, 세계 곳곳에서 이를 이용한 작업을 선보여 왔습니다. 빛으로 도심에 그리는 '그래피티 아트'입니다.
2008년에도 파우더리 씨는 그래피티 리서치 랩의 동료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홍대 앞 상상마당, 광화문 코리아나 호텔 등 건물 벽에 레이저로 ‘그래피티’를 구현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예술가가 아닌 거리의 시민들이 이들의 ‘그래피티 아트’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의 작업에는 2008년 여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로 처음 시작됐던 촛불집회가 이어지고 있던 서울의 분위기가 반영돼 있습니다. '그래피티 아트'는 속성상 사회에 대한 발언의 성격이 짙고, 참여 지향적입니다. 파우더리 씨는 중국에서 그래피티 작업 중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에 체포돼 며칠간 구류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래피티 리서치 랩의 이반 로스와 제임스 파우더리가 2003년 루게릭 병 발병 이후 전신이 마비된 그래피티 예술가 토니 콴에게 다시 창작의 기회를 주자는 아이라이터 프로젝트에 선뜻 나선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이들은 아이라이터를 개발한 후 제작 방법과 소프트웨어를 모두 공개했습니다. 특정인이 저작권을 독점하지 않고, 사회 전체가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에 둔 것이지요. '아이라이터'가 오픈 소스 운동의 중요한 계기로 일컬어지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사실 '아이라이터' 같은 기기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문회사 제품은 2만 달러가 넘는다고 합니다. ‘아이라이터’를 만든 이들은 '아이라이터'가 전문 제품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합리적이고 저렴한 '대안'이 될 수 있고, 이 ‘대안’이 시장에도 영향을 미쳐 변화가 일어나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말합니다.
미국에서 장애인은 마치 2등 시민처럼 취급 받고 있습니다. 사회 인프라가 그렇게 돼 있어요. 안구추적장치는 전신마비 환자들한테는 '필수품'인데도, 미국의 의료 체계는 이를 필수품이 아니라 부차적인(secondary) 기기로 분류해 보험 혜택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전신마비 환자들한테 '소통'을 가능하게 해 주는 기기가 부차적인 것이라니요. 우리가 만든 아이라이터는 그래서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이라이터는 단순히 일군의 예술가들이 어떤 기기를 만들어서 시장에 내놓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저희는 시장이 이로 인해 바뀌기를 바랍니다."
이제 '한국판 아이라이터'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제임스 파우더리 씨는 최근 개발된 아이라이터 2.0의 부품 리스트를 받아서, 이를 들고 한국의 전자상가를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아이라이터를 제작하기 위한 부품을 사 모으는 것이지요. 저는 인터뷰를 마친 후 그와 함께 용산 전자상가에 갔습니다. 저로서는 용도를 알 수 없는 온갖 작은 부품들이 많이 필요하더군요. 용산에서 구할 수 없는 부품들도 많았는데, 상인들은 청계천에 가 보라는 조언을 해줬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판 아이라이터 제작에 부품 조달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한글 타자 인터페이스 개발 경험이 있는 프로그래머의 협력을 얻는 일이고, 실제로 아이라이터를 사용할 환자도 찾아야 합니다. 토니 콴이 아이라이터 개발 과정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앞서도 말씀 드린 바 있습니다. 일반인의 눈동자 근육은 그리 강하지 않아서 아이라이터 개발에는 반드시 이 기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환자가 실제로 시험해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합니다.
아이라이터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 이유가 뭐냐는 제 질문에, 파우더리 씨는 '이걸 계속하지 말아야 할 좋은 이유를 하나도 찾지 못했다'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규율을 깨뜨리고 문제를 일으켰던 말썽꾸러기 아티스트들’이 아이라이터로 드디어 ‘착한 일’을 하게 되어 요즘은 칭찬만 받고 다닌다고 농담을 했습니다. (아이라이터 프로젝트는 요즘 세계 유수의 디자인-미디어아트 관련 상을 휩쓸고 있는 중입니다.)
세상과 소통하려는 예술가들, 그리고 기술의 혜택을 나누려는 엔지니어들의 열정이 합쳐진 아이라이터 프로젝트. 이는 많은 사람들의 '선의'로 세상을 조금이나마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내려는 '운동'이기도 합니다. 한국에서 이 프로젝트가 어떻게 진행될지 저도 굉장히 궁금합니다. 제가 보도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아이라이터 프로젝트에 대해 더 자세한 내용은 http://www.eyewriter.org/ 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이 페이지를 통해 아이라이터 개발팀과 연락할 수도 있고, 아이라이터 프로그램 소스도 공개돼 있습니다. )
동영상 기사
동영상 기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