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리얼리즘? 사실주의? 사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번에 '아시아 리얼리즘'이란 제목으로 전시를 개최했는데요.
전시되는 곳은 접근성도 좋고 데이트하기도 좋은 덕수궁 미술관입니다. 전시 제목처럼 아시아 여러 나라의 '사실적'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각 나라에서 반출이 어려운 국보급 작품들도 포함되어 있는데다가 설득력 있는 주제로 기획된 전시여서 특히 주목받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들이 방학숙제를 하기 좋은 전시라고 벌써 소문이 났다며 다른 취재를 통해 만난 선생님 한분이 귀띔을 해주시기도 하는군요.
19세기 말부터 약 100여 년 동안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가 격변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는데요. '아시아 리얼리즘'전은 바로 이 시기의 작품들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사실'이라는 말의 속뜻이 이 시기만큼 중요했던 시기도 없었기 때문에 미술작품들도 역사의 한 부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반영하는 사실적인 작품들을 ‘리얼리즘’이라고 제목으로 묶어 기획한 전시로 보여 집니다.
이렇게 보면 이 전시는 아시아의 역사와 함께 살아있는 미술을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습니다.
- 사실을 그리다
작품에 대한 차분한 설명들은 전시를 준비하시고 공부하신 분들이 많이 해주시니까, 저는 쉽지만 다시 보면 생소할 수 있는 개념들을 얘기해 보려고 합니다.
전시된 작품의 배경들을 모두 알고 감상을 한다면 물론 도움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 바쁜 직장생활 중에 틈을 내서 공부하기는 힘들죠. 그렇다고 아이들에게 유익한 큰 전시회라는데 안 갈수도 없고 말이죠.
그래도 요즘은 오디오 가이드도 있어서 미술관 문턱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게다가 위에서 말씀드렸듯이 주제가 명확해 보이는 전시 작품목록들이 너무나 매력적입니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 '아시아 리얼리즘'인데요. 리얼리즘은 우리말로 사실주의라고 번역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여기에 이견이 있으실 정도의 독자시라면 상당히 교양이 많으실 분일 텐데요. 여기서는 그냥 '사실주의'라고 풀고 같이 얘기했으면 합니다.) 사실 '사실'이란 말만큼 광범위하면서 쉬운 동시에 어려운 말도 없을 겁니다. 과거에는 사실이었다가 지금은 아닌 '사실'들이 많습니다.
새로운 과학이나 지식이 '사실'을 사실은 '사실' 아니었음을 알게 합니다. '사람들'이 항상 '사실'만을 말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사실'로 들었던 사실도 '사실'이 아닐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까 말장난 같네요. '사실'이란 말이 미술과 만나면 더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림이란 것 자체가 사실은 '사실'이 아닌데 '사실주의; 리얼리즘'을 붙이자니 뭔가 철학적인 사색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됩니다.
초중고 시절에 학교에서 배운 구상미술과 추상미술도 헷갈리는데 '사실주의'는 뭘까? 구상미술의 한 부분일까?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뭔가 알아볼 수 있는 그림들, 그러니까 뭐가 사람인지 풍경인지 구분할 수 있는 그림들을 구상미술이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와 대비되는 '알아볼 수 없는' 그림들은 추상미술이라고 대충 미술교과서를 보면서 정리해 버리곤 했습니다. 아직도 떠오르는 건 '차가운' 추상이니, '뜨거운' 추상이니 하며 시험공부를 했던 기억입니다.
'그림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말은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속해 있는 시대의 현실이 담겨 있는 '사실'인건 분명한데, 그림에는 작가의 창의적인 발상이 담겨있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규정할 수 도 없습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역사학에서 미술 작품을 연구재료로 삼는 것을 매우 조심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미술사학이란 학문이 따로 있는 것을 보면 미술 작품을 역사나 시대 속에서 해석 하는 게 한계가 있기 때문일 겁니다.
쉽게 얘기하자면 작품이 ‘예술적이다’ 라고 표현할 때는 시대를 뛰어넘는 화가의 '정신'이 담겨 있음을 뜻할 텐데요.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이 '시대'를 초월한, 뛰어넘는 미술작품들이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굉장히 중요한 역사의 자료란 사실도 부정할 수 없죠. 사실을 그린다는 말에는 시대적인 배경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는 속뜻 외에 형태가 사실적이라는 말도 포함됩니다.
여기서 바로 옛날 학창시절에 배웠던 구상미술과 추상미술의 개념이 도움이 됩니다. 형태의 사실적인 표현은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한 때부터 화가의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신라시대 때 솔거라는 화가가 소나무를 그렸는데 새가 앉으려고 하다가 벽에 부딪혔다는 얘기를 기억하실 겁니다.
또 유원지에서 초상화를 '똑같이' 그려주시는 분들을 만나면 신기하게만 느껴집니다. 어렸을 때 연예인을 똑같이 그리던 친구를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도 '똑같이 그린다'는 것을 많이 생각하면서 살아오긴 했습니다.
여기서의 '똑같다'는 개념은 '사실적'으로 그린다는 것과 비슷한 뜻입니다.
그런데 옛날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자주 만나지 못하던 시기에는 이 '사실적 표현'이라는 말이 지금처럼 누구에게나 비슷하게 알고 있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동양에서는 뭔가 보여 지는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것 보다는 사상이나 철학을 담고자 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겨지는 것 '이상'의 뭔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그림 실력이라고 우리가 손쉽게 생각하는 '똑같이 그리기' 능력이 모든 선비들(그림을 그릴 수 있는 재력과 시간이 허락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아니었을까요)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그래서 고상한 선비정신을 표현하는 그림이란 '뜻'을 담고 있어야 하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은 그 다음 문제였지 싶습니다.
동양화 전체를 이렇게 해석해 버리면 절대 안 되겠지만 우리가 이런 정도의 상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일 겁니다. 서양은 이와 비교되게 원근법이나 명암법이 많이 발달했습니다.
인체 해부를 통해 사람의 몸을 근육 하나하나까지 묘사하는 방법도 먼저 생각해 냈습니다. '뜻 그림'이 전통이 동양과 달랐고 ‘사실적이다’라는 말의 무게도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서로 만났을 때 양쪽은 서로에게 감탄을 하고 맙니다. 서양에서는 원근법 같은 정확한 표현력을 위한 기법이 발전했는데요. 찰나와 이야기를 '재현'해서 보관하는 그림이 주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진'기술이 생기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힘들게 배워 힘들게 표현하는 그림을 사진은 더욱 쉽게 '똑같이' 그릴 수 있었던 거죠. 이런 상황에서 식민지 점령 등을 통해 동양의 그림을 접하게 되는 순간 굉장히 놀라게 됩니다.
자신들의 고민을 너무나 멋지게 해결해 내는 철학이 담긴 그림과, 형태이상의 형태라고 할 수 있는 동양적인 색채와 전통, 원근법 없이도 너무나 아름다운 아시아의 모습을 발견한 겁니다.
지금까지도 미술을 공부하고 창작활동을 하는 작가들에게 동양의 사상과 그림은 굉장한 모티브 중의 하나입니다.
이와 다르게 동양에서는 자신들의 기술이 뒤쳐져서 전쟁에 지고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식민지화 되었다는 자괴감과 함께 서양의 공부를 따라잡기 위해 애를 씁니다.
미술도 이런 흐름에서 자유롭지는 않았습니다. 서양의 전쟁기술은 마치 그들이 우월한 문명인양 느끼게 만들었는데요. 더불어 미술의 원근법, 명암법, 유화기법이 '사실'을 재현해 내는데 더 뛰어남을 보고 뭔가 더 우월한 그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말하자면 동양과 서양은 교류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하면서 서로의 그림에 대해 감탄하고 서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다만 그 과정이 너무나 급변하는 시대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때의 그림 속에는 작가들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서양의 사실적 '재현'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도 하고 전통기법과 섞어보기도 하고 시대의 문제점을 표현해 내기도 하는 등 많은 시도가 이루어 진 것입니다. 일본에서 유화를 거의 처음 그리기 시작한 다카하시 유이치의 '오이란(고급기생)'이란 그림을 보면 이런 특징이 잘 나타납니다.
당시 작가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얀 얼굴로 백칠을 한 오이란이 아니라 나이든 기생의 모습을 그대로 기록한 그림인데요. 하지만 그림 속에서는 전통적인 그림기법도 같이 숨쉬고 있습니다.
전시기획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연구한 김인혜(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원) 큐레이터에게 '오이란' 의 작품설명을 들어보시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아시아리얼리즘' 전의 그림이야기는 계속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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