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2010년 5월15일 오후 1시 반쯤 미국 워싱턴 DC의 C 스트리트쪽 국무부 출입구. 일단의 한국 특파원들과 일본 특파원들이 출입구 한 쪽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마이크까지 설치하고 만반의 준비를 한 상태였습니다.
천안함 사태를 미국 국무부 당국자들과 논의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이용준 외교통상부 차관보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이 차관보는 중앙 출입구가 아닌 측면 출입구로 나왔습니다.
이 차관보는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 특파원을 찾았고, 특파원들도 언제나 나오나 학수고대하다가 저 쪽에 서 있는 이 차관보를 발견했습니다.
이 차관보가 특파원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오려고 해도, 경비원들이 쳐놓은 차단선을 넘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경비원들이 사정을 들어주지도 않았고요. 급기야 특파원들은 급하게 마이크를 떼내고 국무부앞 거리에서 이 차관보를 인터뷰하기 위해 부산을 떨어야 했습니다.
2010년 6월 30일 똑같은 장소 비슷한 시간.
이번에 미 국무부를 방문한 사람은 위성락 한반도 평화교섭 본부장이었습니다. 상황은 거의 비슷했습니다. 더우기 이 날은 이스라엘 군이 터키 국적의 국제구호선을 공격한 것에 항의하기 위해 터키 외교장관이 힐러리 클린턴 장관을 만나고 있던 상황이어서 위성락 본부장이나 한국특파원단이나 왠지 모를 소외감 같은 것들을 느껴야 했습니다.
중앙 출입구는 터키 특파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노기 어린 표정의 터키 외교장관은 기세 등등하게 중앙출입구를 통해 빠져나와 차를 타고 이동했습니다. 그 직후 위성락 본부장은 이용준 차관보가 나왔던 측면 출입구를 통해서 조용히 나왔고,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한국 특파원단은 덜 부산하면서도 기민하게 위본부장을 인터뷰했습니다.
미 국무부의 관례라는 게 있다고 합니다. 즉, 장관급은 돼야 중앙출입구를 이용할 수 있다는 거죠. 한국의 차관급들은 그래서 측면 출입구를 이용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미국측 시각에서는 당연한 관례이자 원칙이고, 그래서 우리측 역시 받아들일 수 박에 없는 건데요, 상황을 지켜보던 특파원들은 웬지 모를 씁쓸함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측 관계자들을 만나고 나온 한국의 고위당국자들은 한결같이 "미국의 전폭적인 지지"를 강조했습니다. 유엔에서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하고, 중국에 대해서도 이번에는 침묵을 지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공감이 있었다는 기세는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강도가 약해졌습니다.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대북 메시지가 중요하다는 말은 결의안이 아닌 의장 성명이 나올 것임을 예고했고, 중국의 대응은 한국 외교부의 기대 섞인 브리핑 내용대로는 되지 않았습니다.
장면 2...
2010년 6월 26일 캐나다 토론토 한미 정상회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많은 말을 쏟아냈습니다.
"천안함 사태와 관련에 북한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무책임한 행동에는 대가들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명박 대통령의 뒤에 확고하게 서있다. 2012년 4월로 예정된 전시작전권 전환 시기를 2015년 1월로 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적절한 시간을 우리에게 줄 것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올바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비준안을 내년초에는 의회에 제출할 것이며 캐나다로 오기 전에 미 무역대표부에 협정을 가로막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한국측과 실무협의를 시작해 오는 11월 주요 20개국 정상회의 참석을 위해 서울을 방문할 때까지 마무리지을 것을 지시했다."
한국 정부가 생각한, 기대한 이상으로 한국측의 희망과 요구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발언이었습니다. 돈독한 한미동맹을 대내외에 과시한 것이고, 오바마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나온 배경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그동안의 만남에서 과거의 어려웠던 시절과 미국의 도움을 연관시키며 오바마 대통령을 감동시킨 것이 작용한 것 아니냐는 분석까지 나왔습니다.
당시 주미 한국대사관측에 "이렇게까지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 편을 들어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우리들도 의아할 정도다. 어쨌든 미국이 한국을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것이 큰 힘이 되는 것은 틀림없다."고 반색했습니다.
장면 3...
2010년 7월 2일 저녁 주미 한국 대사 관저.
한덕수 대사는 70년대 남북대화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교수진과 전직 관료들을 초청해 만찬을 함께 했습니다. 하지만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러시아가 "천안함 침몰을 북한의 공격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자체 조사 결과를 미국 정부측에 통보한 정황이 포착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 정부가 자체 조사 결과를 대외 발표하는 것만은 막아야 한다는 비상령이 떨어졌습니다. 한국 스스로, 또 미국의 도움을 얻어서 말이죠. 이 때부터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이 나올 때까지 물밑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됐습니다.
이 때 상황을 취재하면서 들었던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5월 25일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이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와 두 정상이 통화를 했었는데 당시 통화에서 러시아 정부의 이런 속내가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까 하는 부분입니다. 당시 청와대 브리핑 내용입니다.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은 천안함 침몰 원인이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드러난 것과 관련해 한반도 평화와 안전을 보장하면서 북한에 제대로 된 신호를 주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어제 담화를 통해 밝힌 유엔 안보리 문제를 포함한 대북 대응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한국 측과 긴밀하게 협력해 나갈 준비가 돼 있다. 한국정부가 민관합동 조사결과를 사전에 통보해준 데 대해 감사드린다."
연합뉴스는 이 브리핑과 관련해 "러시아가 한국의 대북 제재 방침에 적극 협조하는 동시에 한반도에서 북한이 추가적 군사 도발을 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의 이후 움직임은 청와대 브리핑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장면 4...
2010년 7월 14일 미 국방부와 국무부 청사.
제프 모렐 미 국방부 대변인과 크롤리 미 국무부 대변인이 한미 합동군사훈련 방침을 공개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최대 동맹국이라고 하는 미국 정부 대변인들이 다른 것도 아닌 한미 합동군사훈련 장소를 말하면서 동해가 아닌 일본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크롤리 대변인은 "미 국방부 발표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확인해 보니 정말 그대로였습니다. 결국 미 정부 당국자들은 별 뜻 없이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한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네티즌을 비롯한 많은 국민이 "미국 정부가 동맹국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고 분노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여전히 침묵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한국 외교부가 대신 해명했습니다. 그것도 이름과 공식 직책을 밝히지 않은 채 외교소식통이라는 이름으로 말이죠.
21일 한미 외교국방장관회담(2+2 회담)에서 한미합동군사훈련 장소를 '한반도 동쪽 해역과 서쪽 해역'이라는 중립적 표현으로 설명하기로 합의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 3월 26일 천안함이 침몰한 이후 한국 정부는 나름대로 총력을 기울여왔습니다. 국제조사단을 참여시켜 나름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이 결과를 유엔안보리 이사국들에게 설명했습니다. 북한에 대한 제재가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한반도 평화가 유지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최대 동맹국으로서의 후원을 역시 그 나름대로 해줬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한국 정부가 국민들에게 얘기했던 것과는 달라졌습니다. 유엔의 강력한 대응은 '천안함이 북한의 공격으로 침몰했다는 명확한 표현 없이 당사국들의 자제를 촉구하는 수준의 안보리 의장 성명'으로 한 풀 꺾여서 나왔습니다.
한국 정부를 강력히 지지했던 미국은 막판 '동해'를 '일본해'로 표기하면서 한국 국민들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냈습니다. 또 미국의 강력한 지지는 역으로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한국 정부와 거리를 두게 한 반작용을 낳았습니다.
외교는 현실이고 게임이며, 전부나 전무가 아닌 주고받기라고 합니다. 천안함 사태 와중에 주미 한국대사관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들었습니다. 동의하고 맞는 말입니다. 다만 46명의 젊은 장병들의 고귀한 목숨을 잃고 나서 한국 정부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세계 만방에 북한을 규탄하고 한국을 지지해달라고 하겠다던 약속은 100%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으로 성장했지만 외교면에서 한국은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입니다. 천안함이 한국 외교에 안긴 또 하나의 숙제이기도 합니다.
* 또 하나, 북한과의 문제를 푸는 일도 남아 있습니다. 한국 정부로서는 북한의 사과, 하다 못해 유감 표명이 없이는 한 걸음도 북한과의 대화쪽으로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국민 여론이 허용할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을 포함한 국제사회는 6자회담 재개 쪽으로 서서히 분위기를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 간극을 한국 정부가 어떻게 좁혀 나갈지도 관심사입니다.
천안함이 대한민국에 남긴 것은...
일본해 논란으로 본 한국 외교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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