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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기스 왜 또 유혈 혼돈 벌어지나

민족분규+정치갈등+경제난=내전 우려 폭동

지난 4월 유혈 시위로 과도정부가 수립된 중앙아시아 키르기스스탄에서 다시 유혈 혼돈이 벌어지고 있다. 남부 제2의 도시 오쉬에서 벌어진 민족 분규가 폭동으로 비화돼 지금까지 100명 가깝게 죽고 1천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과도정부가 군 병력을 총동원해 진압에 나서고 통금 등 비상사태를 선포했으나 폭도들은 군·경의 무기를 탈취하고 곳곳에서 방화와 살상극이 벌어지고 있다. 이미 남부 주요 도시들로 확산된 폭동은 수도 비슈케크로도 번질 기세며, 참혹한 내전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사태 수습능력을 잃고 다급해진 과도정부는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 등 강대국들은 아직은 직접 개입을 거부한 채 사태를 예의주시하는 상황이다.

◇ 남부 민족분규가 폭동으로 비화 = 지난 10일 밤 남부 제2의 도시인 오쉬의 한 카지노에서 키르기스계와 우즈베키스탄계 청년들 간에 시비가 벌어졌다. 이 시비는 곧 남부지역 소수민족인 우즈벡계와 이들을 배척하는 키르기스계 청년들 간의 전면충돌로 이어졌다.

외신들에 따르면, 각목과 돌 등을 든 1천여 명의 젊은이들이 지난 10일 저녁 오쉬 중심가에 모여 상점 창문과 주택의 창문들을 부수고 차를 불태웠다. 수적으로 압도적인 키르기스계 젊은이들의 우즈벡계에 대한 폭력은 폭동으로 비화되고 카라수 등 인근 지역으로 확산됐다. 곳곳에서 무차별 살상과 방화, 약탈이 벌어졌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했다.

남부 제1의 도시 잘랄아바드로 분규가 확대되면서 폭도들이 시내 건물들을 불태우고 경찰서 장악과 지역 군부대에서 장갑차와 무기류를 탈취하는 등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AP 통신은 키르기스 폭도의 공격을 피해 여성과 어린이 등 수천 명의 우즈벡 소수민족이 총격을 받으며 국경으로 피신했고 국경도로에는 어린이들의 주검이 나뒹굴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또 파키스탄인 15명이 납치되는 등 외국인 피해도 잇따르고 있다.

과도정부가 11일 오쉬시에 비상사태와 통행금지를 선포하고 군대를 보낸 데 이어 13일엔 예비군을 동원하고 특수부대원 100명을 오쉬로 급파했으며 필요할 경우 폭도를 사살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그러나 아직 사태는 수습되지 않고 자칫 수도 비슈케크 등 다른 지역으로도 소요가 번질 기세다.

◇ 불안한 정치·경제에 고질적 인종분규가 점화 = 현재 530만여 명인 키르기스 주민의 약 70%는 키르기스계, 14.5%는 우즈벡계, 8.4%는 러시아계 등이다. 특히 우즈벡과의 국경이 있는 남부지역의 잘랄라바드와 인근의 오쉬에서는 우즈벡계가 각각 40%와 50%에 달한다.

이곳에선 소련 시절부터 민족 갈등이 잦았으며, 소련 붕괴 이후 이러한 갈등이 충돌로 이어지고 때로는 유혈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지난달엔 키르기스계가 잘랄라바드에서 우즈벡계 지도자이자 '민중우호대학' 총장인 카디르잔 바티로프의 사임과 체포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다 대학에 난입했으며 이후 폭동이 벌어졌다.

남부지역은 지난 4월 반정부 시위로 축출돼 벨라루스에 망명 중인 쿠르만벡 바키예프 전 대통령의 고향이자 정치적 본거지이기도 하다. 과도정부는 최근의 민족 간 분규와 충돌이 폭동으로 이어지는 배후엔 바키예프 전 대통령의 복귀를 추구하는 세력이 있다고 보고 있다. 지난달 민족분규 역시 바키예프 지지자들의 지방청사 점거와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지역 전문가들은 그러나 유혈 사태가 이처럼 자주 벌어지고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는 배경엔 민족분규와 정치적 갈등 외에도 키르기스의 피폐한 경제상황이 작용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중앙아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키르기스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다.

키르기스의 산업과 자원은 보잘 것이 없고 러시아 등 주변국의 `3D' 업종에 진출한 근로자들의 송금이 경제에서 가장 큰 몫을 차지해왔다. 또 미국 등에 기지를 빌려주는 댓가로 받는 돈이 중요한 외화 소득원일 정도다.

그러나 세계 금융위기로 해외진출 근로자들의 송금이 격감해 경제는 도탄에 빠졌다. 해외에서 쫓기다시피 되돌아 왔고, 거리에 넘치는 젊은 실업자들은 사회불안의 핵으로 떠올랐다. 나라의 곳간이 빈 상태에서 과도정부가 현실을 해결할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가운데 고질적인 민족분규와 정치적 갈등이 언제나 폭동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다.

◇과도정부 최대 위기..강대국 예의주시 = 과도정부가 13일 예비군을 동원하고 특수부대원 100명을 오쉬로 급파하면서 필요하면 폭도를 사살하라는 지침을 내렸으나 이런 강경 조치로 사태를 진정시킬지는 미지수다. 일부에서는 피곤에 지친 군.경이 길에서 잠을 자고 먹을 것이 떨어져 사기가 저하됐다는 보도도 나온다. 장갑차와 무기고까지 습격해 빼앗은 폭도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로자 오툰바예바 대통령 대행은 지난 12일 러시아에 군대를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키르기스 국내 문제일 뿐이라며 즉각 거부했다. 러시아는 다만 13일 공수대대를 보내면서 이는 키르기스에 있는 러시아 군 기지와 장병 및 가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러시아는 집단안보조약기구(CSTO)가 14일 평화유지군 파병 여부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러시아 단독으로는 '내정에 간섭'하는 부담을 지는 것이 위험하므로 지난 2002년 결성된 '러시아판 나토인 CSTO 차원에서 병력을 파견해 치안을 유지할 가능성이 있다.

미국 역시 키르기스 정부로부터 아무런 요청이 없었다면서 아직 사태를 관망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키르기스 내 마나스 기지(수송센터) 문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키르기스를 안마당으로 생각하는 러시아에만 사태를 맡기기 어렵다고 판단할 경우 나름의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미국과 유럽은 유럽안보협력조약기구(OSCE) 차원에서의 개입 등 다양한 수습책을 모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워낙 취약한 과도정부가 남부의 바키예프 지지세력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최대의 난국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이다.

(알마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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